[아르고나] 나유렌나유 - <음악과외>
*나유렌나유 무제 시리즈
*드디어!! 제목을 정했습니다!!
*고등학생 나유타x대학생 과외 선생님 렌
*연령반전 주의 바랍니다
*완고 기념으로 합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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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그렇다니까~ 나나나호시 이번만 좀 도와줘라~"
"으음... 알았어. 이번만 도와줄게."
멋쩍게 웃는 짙은 파란 머리의 청년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같은 과의 친구의 요청을 들어줬다. '덕분에 살았다'라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목에 팔을 감는 친구의 거리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청년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 이번 시험은 맡겼다?"
"이번만이야. 다음은 진짜 힘들어."
"알았어. 알았어."
친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청년에게서 팔을 내려놓고 곧바로 스마트폰을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하며 저멀리 사라졌다. 점점 사라져 가는 친구를 보고만 있자니 청년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거 하고 싶지 않은데... 청년은 친구의 대리시험을 봐주기로 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의 끈질긴 부탁과 쉽사리 거절을 못하는 자신의 성격 탓에 벌써 세 번째 대리시험을 보고 있다. 걸리면 교수님한테 혼날 텐데. 청년은 본인의 성적도 걱정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띠리링-
청년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들리고 청년은 곧바로 주머니 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착신자를 확인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교수에게 전화가 왔다. 청년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연결을 시도했다.
"네. 나나호시입니다."
-아, 나나호시군. 혹시 지금 와줄 수 있겠나? 내 연구실로.
"지금 말인가요? 괜찮습니다만."
-그럼 지금 와주게.
교수는 할말만 하고 통화를 끊었다. 청년의 이름은 나나호시 렌. 카모가와 대학 음악부 보컬과의 학생이다. 방금 자신에게 대리시험을 부탁한 친구는 같은 과의 이와네. 벌써 세 번째 대리시험이 들킨 건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렌은 곧바로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교수의 연구실 앞 대문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똑똑. 두어 번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의 음색이 작게 들렸다. 렌은 그 목소리를 눈치채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아, 나나호시군. 여기에 앉게나."
교수의 연구실은 정돈되어 있지 않고 난잡하게 책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음성학, 화성학, 작곡의 이해.... 모두 렌이 들었던 과목의 교과서들이다. 나이가 이미 많은 교수는 렌이 앉은 소파 바로 반대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렌 앞으로 하나의 서류뭉치를 내밀었다. 혹시나 자신이 대리시험을 봤다는 게 들킨 게 아닐까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게 뭔가요?"
"펼쳐보게."
렌은 교수의 말대로 서류 뭉치를 한장한장 넘겨보았다. 기사를 편집한 칼럼집이었다. 첫 장에 가장 크게 걸려있는 사람은 '전설적인 록밴드 샤나의 보컬리스트 이류코가'였다. 렌은 이류 코가에 대한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일본의 슈퍼스타, 록밴드의 전설, 세계에서도 통하는 재팬밴드... 등등 수식어가 끊이질 않았다. 렌도 이류 코가에 대한건 대충 알고 있었다. 음악대학의 심지어 보컬과 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거다. 이걸 자신에게 준 교수의 생각이 궁금해진 렌은 곧바로 물어봤다.
"그런데 왜 저한테 이걸 주시는건가요?"
"아 실은 이류 코가에게 연락이 왔다네. 아들이 수험생인데 음대에 보내고 싶다고 하는군."
"네에..."
"그 아들에게 보컬 과외를 맡기려고 하는데 이류 코가가 자네를 골랐네."
"네?"
거기까진 생각 못했는데. 왜 이류 코가가 나를? 렌은 그 생각이 먼저 들어서 교수에게 물어봤다.
"저는 이류 코가를 모르는데 어떻게 저에게 과외가 온 거죠?"
"자네 아마추어 밴드를 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아르..."
"아르고나비스입니다."
"그래 그거. 이류 코가가 그 밴드의 라이브를 본 모양이야. 그걸로 인상이 깊게 남았는지 나에게 자네에 대해서 물어보더군."
교수의 말대로라면 이류 코가가 아르고나비스를 안다는 말이 된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동갑인 친구들과 만든 아마추어 밴드가 지하의 라이브 공연장에서 고작 한두 곡 부른 걸 봤다니. 그것도 천재적인 보컬리스트인 이류 코가라는 사람이. 렌은 왠지 모를 설렘이 밀려왔다.
"이건 이류 코가의 집 주소네. 내일 이쪽으로 3시까지 가면 될거야."
"감사합니다."
교수는 렌에게 하나의 명함을 내밀었고 명함은 고급진 검은 종이에 SYANA라는 글자와 함께 이류 코가의 주소와 연락처가 새겨져 있었다. 렌은 명함과 서류 뭉치를 들고 연구실을 나왔다. 내일 이곳으로 과외를 가야 한다니. 그것도 천재적인 보컬리스트 이류 코가의 아들의 과외라니. 상상만 해도 긴장된다.
-
원래 오후 3시에 찾아갈 예정이었지만 어제 저녁 갑작스럽게 이류 코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이 생겨서 내일 아침 8시까지 오세요.'
렌은 그말을 새겨듣고는 잠에 들었지만 알람을 맞추는 걸 깜빡 잊고 만 것이다. 눈을 떴을 땐 이미 7시 40분이 지나고 있었다. 렌은 거의 잠옷차림으로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녹색 운동복에 검은색 뿔테 안경, 정돈 안된 머리로 나갔다. 급하게 뛰쳐나간 탓에 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은 지갑과 핸드폰이 떨어질락 말락 했다.
"헉헉... 다왔다..."
어떻게든 도착했지만 역시 이런 옷차림으론 안 되겠지? 렌은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볼품없다고 생각했다. 이류 코가의 집은 대저택이었는데 이런 부잣집과 자신의 옷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시간은 더 이상 기다려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몸단장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입고 온 운동복에 얼룩은 없는지 재점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컥 문이 열리고 집사와 메이드들이 렌을 반겨주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서오십쇼. 나나호시 님. 위에서 코우가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에... 실례합니다...."
생각 이상으로 본격적이어서 잔뜩 기가 죽은 렌은 들고 온 에코백을 옆구리에 착 붙여서 조심조심 걸었다. 계단은 또 어찌나 고급스러운지 대리석으로 메워진 바닥에선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났고 계단을 하나씩 오를 때마다 렌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이런 고급 저택에서 고등학생을 가르칠 거란 생각은 전혀 못했어!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이류 코가가 있는 방까지 안내받았다. 렌을 안내한 집사는 꽤나 나이가 지긋한 집사였는데 이류 코가의 아버지 시절부터 그를 보좌한 베테랑 집사였다. 신문이나 티브이에서 보는 이류 코가의 이미지하고는 많이 다른 분위기의 집사였다.
"코우가님. 나나호시 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낮게 깔리는 목소리. 문 반대쪽에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모두의 이상향인 이류 코가가 있다. 렌은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주 큰 방안에는 피아노 한대와 널찍한 소파, 그리고 와인을 올려놓는 용의 작은 탁자가 놓여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음악인의 방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악기는커녕 물이나 그런 것도 없었다. 침실이 아닌 건가. 렌은 방에 정말 대리석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전 실례하겠습니다."
"아, 데려다줘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집사는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자 이 안의 공기가 한층 더 무겁게 바뀌었다. 이류 코가의 낮은 음색이 대리석 위를 슬금슬금 지나가고 있었다.
"나나호시 렌. 이른 아침에 부른건 미안합니다."
"아,아닙니다...."
집안에 있는데 선글라스는 왜 쓰는 거지? 렌은 이류 코가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한 군데만 이상하다면 그냥 그러고 말겠지만 모든 게 다 이상했다. 악기라곤 피아노 한 대밖에 없는 방, 그것도 쓸데없이 어마무시하게 큰 방이다. 집안에서 선글라스는 왜 끼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왜 반라인거지....?"
이류 코가는 샤워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거의 흘러내릴 정도로 옷이 단정하지 못했다. 렌은 자연스럽게 운동복을 목 끝까지 올렸다. 이류 코가의 뱀 같은 끈적한 음색이 렌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이 사람이 우리 모두가 존경하는 이류 코가의 본모습이라니. 괴짜라고 생각은 들었지만 상상이상이구나. 렌은 생각을 그대로 말해버리는 버릇이 있지는 않지만 그만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한다.
"반라..."
"제 모습이 충격적인가요?"
"앗, 죄,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저보단 제 아들에게 신경을 더 써줬으면 좋겠군요."
"아드님은..."
"내일부터 만나게 될겁니다."
이류 코가는 아까와 같은 농염한 목소리가 아닌 조금 더 들뜬 아버지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아까처럼 다시 문이 열렸다. 집사가 들어오는 줄 알았지만 집사가 방금 문을 열 땐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열렸다면 지금은 굉장히 거칠고 큰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열렸다. 그리고 바로 들어온 사람은 집사가 아니었다.
집사보다 훨씬 어리고 지금 여기에 서있는 이류 코가보다 훨씬 몸집이 작은 남자였다. 렌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온 이 남자가 바로 자신이 내일부터 가르칠 학생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말하자면 이류 코가의 아들 '이류 나유타'라는 것을.
"나유타, 몇번을 말하게 하는 겁니까.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가 기본 상식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런거 알 게 뭐야. 그보다 어제 준 악보 틀린 부분이 너무 많잖아. 지금 나 놀리는 거냐?"
"아버지에게 너무 말이 센거 아닌가요? 여기 있는 사람도 굉장히 놀란 눈치인 게 안 보이나요?"
"아아?"
나유타는 고개를 돌려 렌을 바라보았다. 이글이글 불타는 눈동자, 심하게 각져있는 눈매, 당장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정전기 오른 머리카락, 결정적으로 나유타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훨씬 날카롭고 예민했다. 렌도 처음 봤을 땐 순간적으로 졸았지만 내일부터 가르칠 학생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마음을 가다듬고 인사를 건넸다.
"나유타군이지? 잘부탁해."
"...... 어이 그래서 이 악보는 어떻게 할 건데."
응? 지금 무시한건가? 무시한 거지? 렌은 자신의 인사가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나유타를 싫어하진 않았다. 나유타의 첫인상은 무서웠지만 그 안에 어딘가 외로워 보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을 봐주지 않는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입고 있는 아이니까 사랑으로 보듬어주는 수밖에 없다.
이류 나유타는 당연하게도 이류 코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이런 대저택에 살고있는 사람은 사용인을 제외하면 단 세명뿐. 이류 코가와 그의 부인과 그의 아들 나유타뿐이다. 부인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고 친정집에서 자주 머문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저택에 실질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이류 코가와 아들인 나유타뿐이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지 마는 건지 이류 코 가는 나유타가 앞에 내민 악보집을 보고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탁자에 올려져 있는 와인을 와인잔에 콸콸 따르면서 핏빛의 와인색을 바라보았다.
"나유타. 지금은 그런 말을 할때가 아니죠. 어서 가서 연습부터 하세요. 어제처럼 기침을 해서 연습을 망친다면... 그땐 알겠죠?"
"....칫."
이류 코가는 와인잔을 들고 핏빛 속에 담긴 나유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찢어진 눈매와 불타오르는 눈동자 속에 비친 나유타의 얼굴은 겁에 질려있었다. 고압적인 아버지의 성격 탓에 나유타는 그야말로 만신창이로 망가져있었다. 결국 나유타는 아무런 소득 없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고 이류 코 가는 나유타가 나간 자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와인잔을 땅바닥에 던졌다. 쨍그랑하는 째지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난 와인잔을 바라보던 렌은 이런 사람 밑에서 나유타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가늠이 갔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에 오세요."
"네,네에..."
"나가세요."
"네. 실례했습니다."
이류 코가는 메이드에게 깨진 와인잔을 치우라고 시킨 다음 소파에 앉았다. 렌은 그대로 방문을 조심스레 닫고 아까 봤던 집사의 도움을 받아 대문까지 바래다주었다.
"오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나호시 님. 코가님을 보셔서 알겠지만 나유타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마세요. 제가 잘 가르쳐보겠습니다."
"아니요, 가르치는 것보다 더 큰 문제입니다."
렌을 데려다주었던 집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나유타 도련님의 마음을 치료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많이 외롭고 힘드셨을 거예요. 부디 이 늙은 집사의 얼굴을 봐서라도 부탁드립니다."
렌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집사가 머리를 숙이고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을까. 렌은 자신이 음악적으로는 지도를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유타를 이류 코가의 품에서 독립할 수 있게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걱정마세요. 그것도 저한테 맡겨주세요."
"나나호시 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때도 저를 불러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대저택을 나와 저택을 쳐다보았다. 처음 봤을때는 별 다른 생각이 안 들었는데 이류 코가와 나유타를 보고 나서 다시 저택을 보니 악마의 소굴처럼 보였다. 내일부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과외를 시작해야 한다.
***
02
시간이 흐르고 기대하던 과외 첫날 아침. 렌은 평소보다 들뜬 마음으로 외출을 준비했다. 저번과 같은 실수는 다시는 하지 않으리 다짐하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머리를 정돈했다. 전날밤 좋아하는 스타파이브 극장판을 보고 자느라 잠을 설친 렌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그래도 오늘은 과외 첫날이니까. 나유타군은 어떤 사람일까? 역시 이류 코가처럼 좀 까다로우려나.'
렌은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이류 나유타라는 아이가 어떤 아이일지 생각했고 뒤로 가서는 이류 코가의 라이브 공연이 언제인지 생각했다. 렌과 같은 보컬리스트는 세계적인 천재 아티스트인 이류 코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의 노래는 독보적이었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좋아. 이정도면 되겠다."
마지막으로 콘텍트 렌즈를 끼고 하늘색 아우터를 걸쳐 입고 집 밖을 나섰다. 저번처럼 급하게 달려온 티를 내지 않기 위해 깔끔하게 옷맵시를 가다듬었다.
"늘 올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역시 진정이 안돼..."
이류 코가의 저택은 매우 웅장하고 압도되는 느낌을 주지만 그거와 별개로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고급스러운 저택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사자의 입속에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렌은 초인종을 누르기 전에 심호흡을 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나고 대저택의 거대한 문이 차례로 열리며 메이드와 집사들이 렌을 맞이했다. 성대한 대접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렌은 쭈뼛거리며 그들의 환대를 받으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곳에는 저번에 봤던 중후한 집사가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는 렌을 보더니 누그러지게 웃으며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나호시 님."
"안녕하세요."
"도련님은 안쪽에 계십니다."
"감사합니다."
렌은 집사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나유타가 있는 방까지 안내를 받았다. 저택에는 수많은 문들이 있었다. 그야 이만큼 크고 이만큼 사용인이 많으니까 당연한거겠지만 나유타가 있는 방은 그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었다. 저번에 들렀던 이류 코가의 방과는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었다. 집사 덕분에 쉽게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렌은 나유타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유타 도련님. 나나호시 님 오셨습니다."
"아?"
"아,안녕하세요."
렌은 집사의 뒤에서 몸을 엎드려며 살짝 얼굴을 내보이며 잔뜩 성이 난 나유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정전기가 오를 것 같은 그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집사는 '끝나면 다시 오겠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졸지에 같은 방에 갇혀버린 렌은 왼쪽 어깨에 걸친 에코백을 움켜잡았다. 나유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렌의 귀를 간지럽혔다.
"뭐냐."
"아 오늘부터 신세지게 된 나나호시 렌이라고 합니다."
"왜 이방에 있지?"
"그야... 오늘은 나유타군을 만나러 왔으니까?"
"..... 꺼져."
나유타는 렌을 보자마자 눈앞에서 사라지라는 막말을 하기 시작했다. 렌은 심장이 덜컥 주저앉았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선생님의 체면이 안 선다는 걸 눈치채고 심호흡을 한번 하고 다시 나유타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유타군을 만나러 왔으니까 나랑 이야기를 해보는거 어때?"
"왜 내가 너같은 녀석이랑 말을 해야 하지?"
"왜냐니... 난 나유타군의 선생..."
"꺼져라. 그녀석 방은 3층이니까."
"그녀석이라니?"
렌은 다시 고개를 갸웃하고 나유타를 바라봤다. 나유타는 '이 녀석 제정신인가?'라는 표정을 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유타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렌을 만났을 때 반라의 상태인 아버지와의 대면이었기 때문에 멋대로 그가 이류 코가의 새로운 '소년'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류 코가는 부인에게 큰 관심이 없어서 집에 새로운 애인을 들이고는 했다. 나유타는 그런 아버지에게 크게 실망하여 집 밖을 나가고 싶었지만 이류 코가는 아들인 나유타에게 자신의 피를 이은 유일한 혈육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집착이 컸다. 또한 아들의 노래는 아버지의 노래와 닮아있었다. 나유타는 그 사실을 생각하기만 해도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몰려와서 그만 입을 급하게 가리고 헛구역질을 했다.
"콜록콜록!"
"나유타군!"
"하아... 나가라고 했잖아."
"이런 상태에서 너를 두고 어떻게 가."
"나가라고!"
"....."
렌은 아랫입술을 강하게 물었다. 나유타의 마음의 상처가 생각보다 더 심했다. 아직 어른의 손길이 필요한 아이처럼 잘못하다간 검은 손길에게 삼켜질 것 같은 위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잔뜩 털을 부풀린 길고양이처럼 사람의 손길을 절대 타지 않았다. 나유타보다 연상인 렌도 그의 고압적인 모습에 움찔하여 아무말도 못 했다. 렌이 좀처럼 방에서 나가지 않자 나유타는 말귀를 못알아듣는거냐며 더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다. 렌도 그에 지지 않게 반박을 해봤지만 나유타의 날카로운 눈빛에 그 말도 묵혀버렸다.
"알았어. 지금 네 상태로는 도저히 과외는 무리겠다. 우선 쉬고 다음에 다시 하자."
"무슨 소리야."
"응? 나유타군 지금 상태로는 과외 못하겠다고..."
"과외라는게 무슨 소리냐고."
렌은 순간 당황했다. 나유타군 설마 모르는 건가? 내가 나유타군의 보컬 선생님이라는 걸? 아니면 이것도 나를 무시하는 발언 중 하나인 건가. 하지만 나유타의 얼굴을 보니 정말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나유타의 눈썹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어서 내가 하는 말에 대답해라'라는 표정이었다. 렌은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줘야 할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입을 연 순간 나유타에게 제지를 당했다.
"뭐가 목적인진 모르겠지만 나한텐 신경쓰지 마라."
"목적 같은거 없어."
"그래봤자 이류 코가를 노리고 온 녀석이겠지."
"아니 이류 코가가 아니라 나유타군을 만나러 왔다니까..."
"넌 그녀석의... 하아, 내가 이딴 말을 해야 하는 것도 짜증이 나니까 꺼져."
나유타는 얼굴을 구기고 머리를 잔뜩 헝클이고는 답답한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나유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렌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있었지만 나유타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고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
"넌 이류 코가의 애인이잖아."
"뭐?"
"......두번 말하게 하지 마라. 역겨우니까."
렌은 그제서야 나유타가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날을 세우는 이유를 알아차렸다. 나유타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렌은 어떻게든 이 오해를 풀기 위해 설명을 하려고 몸짓까지 써가며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이미 나유타는 단단히 오해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까 렌을 데리고 왔던 중후한 집사가 들어왔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자신감은 무엇이냐며 핀잔을 줬지만 집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노크를 하지 않은 무례는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도련님. 하지만 여기 계신 나나호시 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애초에 도련님에게 붙인 새로운 보컬 트레이닝 선생님이십니다. 주인님의 애인이라던가 그런 게 아니고요."
"하아?"
"정말입니다. 이 제가 집사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나유타는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됐다는 걸 눈치채고 혀를 한번 찼다. 사과는 하지 않았다. 오해를 한건 맞지만 그것이 엄청난 잘못은 아니니까. 대신 렌에게 여기에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기만 했다. 나유타가 마음을 연 순간이었다. 아직 갈길은 멀어 보이지만.
"칫. 마음대로 해."
"알아줘서 고마워."
"그럼 늙은이는 다시 가보겠습니다. 뭔가 안 풀리는 일이 있다면 다시 오겠습니다."
렌은 집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방문을 닫았다. 그런데 집사가 갑자기 이곳으로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것은 어디선가 듣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니 렌은 식은땀이 났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유타는 다시 한번 한숨을 쉬더니 근처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렌을 올려다보았다.
"불러라."
"응?"
"노래."
지금 나를 시험하는건가? 내가 보컬 트레이닝 선생님이 될 자격이 있는지? 렌은 나유타의 무언의 압박에 숨을 참았다. 본인이 더 나이가 많음에도 나유타의 강압에 먹히는 것 같았다. 마치 그때의 이류 코가처럼 사자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노래 부르면 나유타군도 부를 거야?"
"내가 노래를 부르는건 내가 결정할 일이야.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보컬 트레이닝 선생이 왔는지 알아? 모두 나의 노래를 듣고 뛰쳐나갔다. 나보다 노래를 못하기 때문이지. 가르칠 학생보다 노래를 못한다는 창피함이 결국 그만두게 만든 거다. 너도 그 녀석들과 같다면 더 이상 여기 있을 이유가 없어. 꺼져라."
심하게 말하는 나유타의 말에도 렌은 당황하지도 동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언제든지 노래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이 데모곡이 녹음된 핸드폰을 들었다.
"..... 언젠가 봤던 희망엔 다다랐니."
그리고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렌의 노래에 나유타는 움찔했다. 이제까지 들었던 노래하고는 확실히 다른 창법과 멜로디였다. 렌의 노래는 색깔로 따지자면 바다와도 같은 푸른색이다. 시원하게 내지르는 고음이 바닷속으로 들어가듯 단단하게 나유타의 귀에 꽂혔다. 힘찬 에너지가 담긴 그의 노래에 나유타의 마음이 반응한 것인지 나유타는 그만 부르라며 그 노래를 멈췄다.
"....어때? 합격이야?"
"....."
나유타는 말을 하지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렌의 핸드폰을 빼앗아 들었다. 갑자기 핸드폰을 빼앗긴 렌이 무슨 짓이냐며 핀잔을 주려고 하자 나유타는 다시 데모곡의 재생 버튼을 누르고 그 노래를 주의 깊게 들었다.
"합격이구나."
렌은 그제서야 살며시 웃었다. 이 집에서 처음으로 짓는 미소였다. 나유타는 렌이 부른 노래의 데모곡을 흥미롭게 들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음악 스타일이지만 렌의 노래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그것이 나유타 하고는 다른 점이었다. 나유타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강력한 노래를 가지고 있지만 렌은 반대로 사람을 끌어당기는 따스한 노래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은 내가 정한다. 매주 토요일 9시. 그때가 아니면 안돼. 그리고 이 노래는 절대 그 녀석에게 들려주지 마라."
"그녀석이라면 이류 코가?"
"그래."
"왜 그래야하는진 모르겠지만 알았어. 나유타군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게."
렌은 결의에 찬 얼굴로 나유타를 바라보았다. 렌은 보기에는 연약해 보이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심지가 있었고 절대 꺾이지 않는 의지가 있었다. 반대로 나유타는 보기에는 강해 보이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섬세함과 째지는 고음이 있었다. 그 고음은 언젠가 '천식'이라는 병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그 탓에 마음껏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나유타는 결국 몸을 사리며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고 그탓에 아버지의 기대에 못 미쳤다. 결국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아들은 아버지의 눈밖에 날 수밖에 없었고 더 한 스파르타식 교육이 나유타를 망가뜨렸다.
'나유타군이 마음 놓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렌은 나유타가 그의 아버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유타가 '즐겁게' 노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 생각으로 나유타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보이고, 이 보컬 트레이닝을 성공적으로 마치자고 생각했다.
***
03
어느덧 시간은 흘러 렌이 나유타를 가르치기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처음엔 나유타도 렌을 가까이 두고 싶어 하진 않았지만 렌의 노래와 렌의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지금까지도 레슨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렌이 나유타를 가르치고 있는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렌은 나유타의 집에 정기적으로 오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안녕 나유타군. 와아, 오늘은 교복입었네? 가쿠란 잘 어울린다."
보통의 레슨 시간이라면 토요일 오전 9시이니까 나유타가 교복을 입을 일이 없었다. 단지, 그날은 토요일에 아버지인 이류 코가의 라이브가 있는 날이었고 나유타는 그곳에 참가를 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레슨 날짜를 앞당긴 것이다. 시간은 오후 8시. 나유타가 학교가 끝나고 저녁을 먹은 후의 시간이었다.
렌은 별 생각이 나유타를 칭찬했지만 나유타는 내심 기분이 좋았다. 본인의 옷차림까지 신경을 써줄줄은 몰랐을 테니 말이다. 가쿠란을 입은 나유타는 렌에게 신선한 충격을 줘서 마치 두 사람 모두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가쿠란은 동경하게 돼. 난 블레이저 교복이었거든. 가쿠란은 어떤 느낌이야?"
"..... 나중에 입어보게 해줄게."
"정말? 후후, 고마워."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마다할 수 있을까. 나유타는 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만의 애정표현이란 걸 눈치챈 렌도 바로 고맙다고 해맑게 웃었다.
"시간 없다. 얼른 끝내."
"응. 알았어."
렌이 하는 레슨은 별로 특별한게 아니었다. 나유타의 음정을 맞춰주고 기초적인 보컬트레이닝을 하는 것밖엔 없었다. 렌은 피아노도 못 치기 때문에 음정을 잡는 것도 나유타 본인이었다. 렌은 피아노 화음으로 음정을 잡는 나유타를 보면서 같이 노래를 불러줄 뿐이었다. 그것밖에 없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는 편안한 기류만이 흘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시간이 많이 늦었네."
마지막은 역시 렌과 나유타의 듀엣. 나유타의 방은 방음이 철저해서 노랫소리가 방밖으로 새지는 않지만 이류 코가의 귀가 너무 밝은 탓에 나유타는 마음껏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도 옛말. 렌과 함께 부르는 듀엣으로 나유타만의 노래가 아닌 두 사람의 노래가 되어 이류 코가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어졌다. 듀엣이 끝난 후에는 약간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이는 렌이 후련한 표정으로 나유타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멋진 노래였어. 이정도면 음대는 바로 붙겠는데?"
"......."
나유타가 목표로 하는 음악대학교는 이류 코가가 나온 대학교로 경쟁률도 높고 들어가기도 힘든 엄격한 학교다. 렌은 그 학교에 다니고 있지는 않지만 나유타의 노래 실력이 본인보다 훨씬 앞서고 있다는 걸 진작에 눈치챈 덕분인지 나유타를 칭찬하기 바빴다. 하지만 나유타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야 해. 그 사람을 따라잡기 위해서. 이런 곳에서 안주하고 있을 시간 없어. 그런 생각이 나유타를 집어삼켰다.
"나유타군?"
"윽...."
"나유타군 괜찮아? 얼굴 색이 안 좋아 보여..."
젠장. 왜 하필 지금이야. 나유타가 오래전부터 앓고 있던 천식은 아버지인 이류 코가를 떠올릴 때면 그 천식이 발작했다. 폐를 망가뜨리는 최악의 적은 천식이 아니라 천식을 자꾸 내보이려고 하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나유타가 입을 가리고 무릎을 꿇고 쓰러지자 렌은 심히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썹이 한층 더 찌푸려지고 걱정하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유타는 렌의 그 모습에 그만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그만 가봐."
"이런 상황에서 널 어떻게 두고...."
"나가라면 나가!"
쿨럭. 거센 기침과 함께 침방울을 머금은 선홍빛의 액체가 흘러나왔다. 분명 이것은 기침을 너무 심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건 내가 천식이 아닌 다른 병에 걸려서 그런게 아니야. 절대. 나유타는 급하게 입을 막으며 가뿐 숨을 몰아쉬었다. 천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서 다른 병이 있다는 게 그 사람에게 알려지면 그때는 정말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하아...하아..."
"우선 쉬자. 일어날 수 있겠어? 내가 잡아줄게. 자."
"나...가라고...했잖....윽..."
"나유타군!"
아까까지만 해도 즐거웠던 기억들은 순식간에 병과 함께 삼켜졌다. 뱀과 같은 그 입술이 나유타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에겐 재능이 없어요'라고... 분명 아까까지 들렸던 렌의 명랑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나유타군이라면 분명 멋진 노래를 부를 수 있을거야.'
'난 나유타군을 믿어. 이번 곡도 가볍게 통과네.'
'나보다 훨씬 높은 곳을 목표로 하고 있겠지. 정말 대단하다.'
렌은 나유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한 옷맵시를 칭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음악적 센스와 가창력도 인정했고 그만이 눈치챌 수 있는 나유타의 상냥함을 칭찬했다. 그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만은 너의 편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그날도 칭찬일색이었고 분명 그런 행복한 날만 가득했어야 했다.
나유타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렌은 그때 봤던 중후한 집사를 급하게 불렀다. 집사는 눈썹을 찌푸리며 일상 있는 일이라며 렌을 진정시키고 나유타를 다른 방으로 옮겼다. 숨소리가 고르지 못해 헐떡이는 소리가 방안을 울리고 있었다. 집사는 나유타의 옷깃에 묻어있는 피를 보고 렌에게 급하게 물었다.
"나유타 도련님이 각혈을 하셨나요?"
"그런 것... 같아요. 혹시 나유타군에게 뭔가 큰 병이라도...!"
"천식은 어릴때부터 앓고 있었던 병입니다. 하지만 다른 건 전혀..."
"구급차를 부르는게 나을까요?"
"하지만 그랬다간 이 사실을 주인님이 아시게 될 겁니다."
"이류 코가 말인가요? 저, 죄송하지만 나유타군과 이류 코가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나요? 나유타군을 꼭 돕고 싶습니다."
렌의 굳은 눈동자가 집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렌의 표정을 읽은 집사는 그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이라면 나유타를 구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집사는 약간의 마른기침을 하더니 잠들어 있는 나유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류 코가의 학대에 가까운(아니 학대가 맞다) 보컬 트레이닝에 관해, 그리고 나유타의 천식에 관해, 마지막으로 나유타가 왜 그렇게까지 음악에 집착하는지까지... 집사의 이야기를 들은 렌은 나유타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어했다.
"그런 일이 있었다니... 난 정말 하나도 몰랐어..."
"하지만 도련님은 나나호시님이 오실 때마다 편안한 표정이셨습니다."
"어떤 표정이었죠?"
"저는 나유타 도련님을 갓난아기때부터 모시던 몸이라서 도련님의 어린 시절도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시절의 얼굴은 남아있지 않지만 아주 가끔 기분 좋을 때 상냥한 표정을 지으세요. 나나호시 님이 곁에 있을 때 그런 표정을 짓습니다."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나유타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았다.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는 나유타가 가여웠는지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만 집사는 눈물을 흘렸다. 그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렌이 같이 눈썹을 내리며 그를 달래주었지만 집사는 렌의 손길을 거절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저보다도 나유타 도련님 곁에 있어주세요. 분명 안심이 되실겁니다."
"네, 그럴게요. 나유타군의 힘이 되어주고 싶으니까요."
"나나호시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그렇게 집사는 온화한 미소로 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까지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된다고 말리는 렌을 무시하고도 계속해서 머리를 수그렸다. 집사는 렌에게 주방에서 죽을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하고는 방을 떠났다. 집사가 방문을 닫는 소리가 옅게 퍼져나갔고 고요한 평화가 찾아왔다. 렌은 나유타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서 앉아서 그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숨은 고르지 못했지만 아까보단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조용히 나유타의 뺨에 손등을 가져다대었다. 식은땀이 흘르면서 렌의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렌은 아까 집사가 한 말을 떠올렸다. 렌이 옆에 있는 것만 해도 나유타는 편안해했다. 반대로 렌이 없으면 가장 불안한 것도 나유타였다. 렌은 나유타의 목에도 살짝 손을 올려놓았다. 목 주변이 뜨겁다. 이런 목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구나. 괜스레 자신이 했던 보컬 트레이닝이 나유타의 목에 무리를 주고 있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이번엔 나유타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펄펄 끓는 열은 아니었지만 미열이 있는 건 확실했다. 차갑지도 않고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하였다. 그 짧은 입맞춤 덕분인지 나유타는 순식간에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인상을 쓰면서 헉헉대지도 않았고 식은땀도 흘리지 않았다.
'다행이다. 괜찮아지고 있나봐.'
렌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유타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수에게 공황장애가 올 수도 있고 쇼크도 올 수 있다는 것쯤은 렌도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처음 음대에서 가창시험을 봤을 때 그런 쇼크가 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유타가 가진 그 쇼크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렌은 의자에서 일어나서 나유타에게로 조금 더 다가갔다. 숨소리를 듣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댔다. 열이 다 떨어졌는지 알기 위해 이마를 콩 하고 가져다 대었다. 열은 없네. 숨소리도 안정적이고. 이대로라면 곧 깨어날 것 같아. 깨어나기 전에 잠깐만이라도 괜찮겠지... 하지만 곧바로 눈에 보이는 건 나유타가 입고 있었던 가쿠란이었다.
"나도 참 어린아이를 상대로 뭐하는거야..."
"어이."
"....!"
렌이 죄악감을 느낄 새도 없이 나유타는 곧바로 눈을 떴다.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서 날카로운 그 눈을 뜨고 똑바로 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방금 그것들 모두 봤을까? 렌은 갑자기 부끄러워져서 시선을 피하고 급하게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렌의 팔목을 붙잡은 나유타가 그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가지마."
"응?"
"......"
"그건.... 어리광이야?"
한살 차이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고등학생. 충분히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자격이 있다. 형의 사랑을 받고 자랄 자격이 충분했다. 렌은 그동안 나유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만 왜 그보다 더한 칭찬을 하지 않았는지 후회했다. 본인이 붙잡아놓고는 막상 잡아두니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에 전한 한마디가 '가지 마'였던 것이다. 렌은 나유타의 이마에 본인의 이마를 다시 가져다 대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열을 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와 고동소리를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나 여기서 안떠날거야. 그러니까 안심해."
이마를 만대고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점점 똑같아졌다. 렌의 온화한 목소리는 나유타의 귀를 간지럽혔다. 듣기 싫은 목소리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했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처음 만났던 그날에 불렀던 노래가 생각났다. 그때처럼 두 사람이 '희망'에 다다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세상은 둘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지금 들어가시면....다...안됩....!!...!"
"무슨 소리지?"
"문열지 마."
"응?"
"...!?....!!....제발...지금은....!"
"문열지 말라고."
"하지만 밖에 누가 있는 것 같은데."
"열지 말라면 열지 마!"
쾅-
렌은 문을 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 앞에 서있는 사람은 나유타의 아버지 이류 코가였다.
"주인님! 죄송하지만 이번만큼은 이 늙은이의 얼굴을 봐서라도...."
"Get out."
"......네."
아무리 렌과 나유타의 친한 집사여도 이 집의 절대적인 권위자 이류 코가에게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이류 코가는 상당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하여 당장이라도 나유타를 때릴 심산이었다.
"나유타. 여기서 뭐하는거죠? 내일이 라이브라는 거 잊진 않았겠죠."
"아아. 잊을리가 없잖아. 그런데 그게 지금 이거랑 무슨 상관이지?"
"나오세요. 트레이닝 시간입니다."
이류 코가는 나유타가 안 보여서 찾고 있었다. 나유타의 방에 가봤지만 어디에도 없어서 급하게 사용인들을 불러 모아 나유타를 찾으라고 일러두었지만 아무도 찾질 못해서 집사장을 불렀던 것이다. 늙은 집사장은 나유타와 렌이 있는 장소를 알리지 않았지만 계속되는 추궁에 어쩔 수 없이 알려주었지만 렌과 나유타가 같이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길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를 말렸지만 그마저도 속수무책이었다.
"잠시만요."
이류 코가를 멈춰 세운건 나유타도, 집사장도 아닌 렌이었다.
"나유타군은 방금까지 저와 보컬 트레이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많이 지쳤어요. 이대로라면 내일 라이브는 못할지도 몰라요. 아니, 분명히 못합니다. 오늘은 쉬는 게 좋습니다."
"나유타는 제 아들입니다. 당신하고 상관없으니 돌아가세요."
이류 코가는 코웃음을 치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렌을 노려봤다. 나유타에게 명령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단 한 명 이류 코가 뿐이었다. 그건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 법을 어기려는 사람이 등장한 것이다.
"하, 잘리고 싶은겁니까? 그게 아니면 나유타와 함께 있으면서 무언가 감정이라도 싹튼 모양이죠?"
"잘려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유타군은 제 학생입니다. 흑심을 품고 접근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보컬 트레이닝을 시키고 있는 선생으로서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만약 오늘 이대로 나유타군을 쉬게 하지 않고 더 레슨을 진행했다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만해!"
눈도 깜짝하지 않고 이류 코가에게 언변을 늘여놓는 렌을 멈춰세운건 옆에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동공이 심하게 흔들려가는 나유타였다. 렌의 팔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놀란 렌이 기우뚱하며 나유타 쪽으로 기울어졌다. 이를 본 이류 코 가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나유타군이...!"
"그만 됐어.... 어이, 빨리 트레이닝 실로 가지."
"나유타군...."
"넌 따라오지 마."
나유타는 렌을 본인 쪽으로 끌어당기더니 곧바로 손을 놓아주었다. 나유타의 뜨거운 손이 렌을 지나쳐서 이류 코가 쪽으로 향했다. 가고 싶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그걸 눈치챘지만 말하지 못한 렌은 자신이 미워졌다.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것도 렌이었고 나유타를 뱀의 소굴로부터 지켜내고 싶은 것도 렌이었다.
"다음부턴 오지 마."
"하지만...."
"넌 재능이 없어. 나하곤 어울리지 않는다. 다른 녀석들이랑 다를 게 없어."
거짓말. 렌을 이곳에서 빠져나오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돌아가죠. 나유타."
"아아."
"잠시만요! 이대로 아드님을 잃어버리면 슬프시지 않겠어요?! 당신도 부성애라는 게 있잖아요!"
렌은 떠나가는 나유타를 잡아보기 위해 급하게 손을 뻗어보았다. 이말로 이류 코가에게 약간의 빈틈이라도 생기면 나유타를 빼내오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쓰레기에 불가했다. 빈틈이 보이기는커녕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죠? 부성애라니. 나유타는 저의 도구입니다. 내일 라이브에서 나유타가 이걸 견딜지 말지는 그에게 달렸습니다. 만약 해내지 못한다면 버리는 수밖에 없겠죠."
렌은 그제야 집사장이 말한 내용이 이해가 갔다.
'나유타 도련님의 마음을 치료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동안 많이 외롭고 힘드셨을거에요. 부디 이 늙은 집사의 얼굴을 봐서라도 부탁드립니다.'
이 집에서 일어난 일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단시간에 렌은 이 집의 구조와 이류 코가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말은 나유타를 이 집에서 꺼내달라는 말이었다. 마치 뱀의 탈피 껍질처럼 건조함밖에 남지 않은 이 집에서 그의 공허한 마음을 구해달라는 의미였다.
***
04
Bring it on Bring it on~
렌은 아주 어릴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록 페스티벌에 간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노래가 아직도 잊히지 않아 그 길로 그대로 음악을 전공하게 되었다. 처음 실용음악과로 진로를 정했을 때 선생님은 믿지 않았다. 렌이 너무 어려운 길로 가는 것이라 생각하여 생각을 다시 해보라며 그를 설득했지만 렌은 실용음악과에 너무 가고 싶었던 나머지 그 자리에서 교감선생님과 담임선생님이 모두 있는 앞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렌의 노래가 교무실 전체에서 울려 퍼지자 그제야 선생님은 렌의 진심을 알고 그가 쓰고 싶은 대학을 마음껏 쓰라고 등을 밀어주었다. 그의 노래를 들은 선생님들 중 한두 명은 눈물을 흘렸고 나머지는 박수를 치며 감동을 받았다.
렌은 카모가와 대학교 실용음악고에서 보컬 진학을 하게 되었다.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이 시작될거라 믿었던 것도 잠시, 학교 내 따돌림이 시작되었다. 렌의 노래는 교수도 감동시킬 정도로 청아하고 아름다운 노래였기 때문에 그를 질투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렌이 쉽사리 거절을 못하는 성격인걸 이용하여 온갖 괴롭힘을 당했다. 그래도 렌은 올곧음을 유지했다.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노래를 마음껏 불렀다. 렌의 순수함을 알아차린 교수는 그를 불러내어 그의 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류 코가'를 소개해주었다.
하지만 렌은 이제 이류 코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혐오한다고 하는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
나유타가 이류 코가에게 끌려간 후 아주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렌은 그 자리에서 나유타를 구해내지 못했다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까까지 나유타와 했던 대화를 기억해 냈다.
'가쿠란은 동경하게 돼. 난 블레이저 교복이었거든'
단순히 가쿠란을 입고 싶었던게 아니었다. 나유타가 입은 그 가쿠란이 입어보고 싶었다. 렌의 아주 작은 호기심이 나유타의 마음을 움직였고 평소의 나유타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하였다.
'..... 나중에 입어보게 해 줄게.'
이류 나유타는 워낙에 예민하여 본인 옷은 물론이고 물건에도 손대는 걸 싫어한다. 그런 까탈스러운 사람이 렌에게만큼은 본인의 것을 모두 허용해 주었다. 렌의 상냥함이 나유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의 칭찬이 나유타를 더 밝게 만들어주었다. 렌과 함께 있으면 나유타는 본인의 예민성이 누그러졌다. 렌이 나 유타에게 해준 칭찬들은 모두 나유타에게 태양 같은 빛으로 나타났다. 렌의 웃음은 나유타가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사람을
데려가야만 하는걸까.
-
이류 코가의 라이브 당일. 이른 시간부터 이류 코가는 나유타를 찾았다. 이번 웰컴 아티스트는 이류 나유타. 이류 코가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세간에 주목을 받고 있는 천재 보컬리스트. 그래서 나유타는 본인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라이브에 설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인 이류 코가의 명령은 절대적. 더 이상 반대한다면 더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나유타의 목을 혹사시킬게 분명했다. 나유타도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서 본인의 목을 지켜내고 있었다. 나유타의 예민성은 아버지인 이류 코가를 닮았지만 이류 코가의 학대에 가까운 그 교육방식이 나유타의 정신을 더 갉아먹었다.
'그 녀석이라도 빠져나오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회장에 들어서기 전 마지막 리허설에서 나유타는 조용히 생각했다. 렌을 그 집에서 빠져나오게 할 수 있었던건 정말 다행이지만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마음에 안 들었다. 물론 그 맹한 과외 선생을 붙여준 것도 이류 코가였지만 선생과 제자가 무슨 짓을 하든 아버지가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인 이류 코가는 이대로 렌과 나유타가 더 가까워졌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나유타. 시간 됐습니다. 올라오세요."
"아아."
나유타는 대기실에서 나와서 회장까지 걸어나갔다. 아버지와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고 있었다. 빨간색 롱재킷과 검은색 목폴라티. 그리고 짤랑거리는 체인 목걸이. 이류 코가는 나유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버지의 음색은 바닥을 기는 뱀과 같았다. 나유타의 어깨에 올려놓은 손가락이 매우 가늘다. 느릿하게 감싸 잡은 그 어깨가 점점 나유타의 목을 타고 올라갔고 곧이어 한 줌에 쥘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류 코 가는 나유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끈적한 목소리가 나유타의 귀에 닿는 것만 해도 소름이 끼쳤지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저곳이 당신과 저의 무대입니다. 따라올 수 있겠죠? 따라오지 못한다면-"
"따라오지 못한다면 두고 간다. 당신이 나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줬던거잖아."
".....Bingo."
스태프들이 두 사람을 에워싸며 계단 위로 올라갔다. 커튼이 열리고 나유타는 강렬한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공연장 한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스탠딩 마이크를 잡으려고 하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유타군."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유타는 본인이 혹여라도 환청이 들린게 아닐까 싶어 애써 모른척했다. 스탠딩 마이크를 잡고 있는 손이 심하게 떨렸다.
"나유타군. 이쪽을 봐줘."
숨이 가빠진다. 그 녀석이 여기 있을리가 없어. 그러니까 이건 모두 환청이야. 어서 노래를 불러야 해.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아직 반주가 깔리지도 않은 회장에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비깅...."
"나유타군!"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나나호시 렌이다. 렌이 나유타의 옆에 서서 큰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쳤다. 회장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두 사람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다. 렌의 옷은 얼마 전 나유타의 집에서 봤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하얀색 바지에 찬 푸른색 머플러와 파란색 재킷이 눈에 띄었다. 나유타가 입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색이었다. 환청도 환각도 아니었다. 분명 이류 코가에게 해고 통지를 받고 울고 있어야 할 네가 왜 여기 있어.
"네가 왜...."
"나유타군과 노래하고 싶어서 왔어. 여기서 나와 듀엣하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나유타군의 노래를 들려주는 거야. 그게 꿈이었잖아. 안 그래?"
"왜.... 어째서 여기 있지....?"
렌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있는 나유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싶으니까. 다른 이유는 없어."
과외가 아니어도, 선생과 제자가 아니어도 나는 나유타군과 함께 있고 싶어. 오직 그뿐이야. 렌은 관객이 있는 회장 안에서 잘도 말했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듀엣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곧이어 렌이 결의에 찬 눈빛으로 나유타의 옆에 자신의 스탠딩 마이크를 세웠다. 용기 있는 그 눈빛으로 관객을 바라보았다. 오늘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어서 감사하다며 예의 바른말을 했다. 나유타는 회장 뒤편을 바라보았다. 이류 코가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처럼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져 있었다. 스태프 몇 명이 그를 간신히 막고 있었다. 나유타는 후의 일이 걱정되었다. 이대로 노래를 불러도 좋은 걸까? 하지만 만약 노래를 불렀다가 라이브를 망치게 된다면 그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다. 사실 나유타는 본인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이류 코가의 스파르타 교육은 늘 있었던 일이었기에 전혀 문제 될 게 없었다. 문제는 렌이었다. 렌이 자신과 같이 노래를 불러서 이류 코가의 눈에 띄어 같이 레슨을 받게 되거나 해코지를 당한다면 그 죄책감이야말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뒤의 일은 생각하지 마. 지금 나와 있는게 행복하잖아. 나는 그래. 나유타군과 함께 노래 부르고 싶어."
렌은 그렇게 말하고 스탠딩 마이크를 잡았다.
"이번을 기회로 더 많이 노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처음 맞춰보는 듀엣이니까 나유타군이 많이 가르쳐줘. 열심히 따라갈게."
렌은 활짝 웃으며 나유타를 향해 말했다. 그의 태양과도 같은 미소가 나유타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 따라오지 못한다면 두고간다."
이류 코가에게 처음으로 배웠던 음악. 그것은 본인이 음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오지 못하면 가차 없이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렌이 나유타에게 맞춰서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끝이다. 나유타는 사냥감을 발견한 육식동물처럼 미소를 지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소름 끼치는 미소였지만 렌은 나유타의 미소에 보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래의 반주가 깔렸고 리허설대로 라그나로크가 나와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들린 반주는 렌이 만든 노래였다. 나유타와 듀엣을 하기 위해 몰래 준비하고 있었던 그 곡이었다.
"그럼 들어주세요. Starting over."
-
시간을 조금 앞당겨, 두 사람이 아직 과외를 하고 있을 때로 돌아간다. 평상시대로 나유타의 보컬 연습을 하고 있던 렌은 남몰래 수첩에 가사를 적었다. 나유타는 본인이 이렇게 힘내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자길 보지 않고 수첩에 가사나 적고 있는 렌에게 괜히 심술이 났다. 마이크를 내려놓고 성큼 다가와 렌의 옆에 앉았다.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는걸 보고 나서 바로 수첩을 빼앗아 들었다.
"아앗!"
"이건 압수다. 너 지금 뭐하는거야?"
"돌려줘! 그건 소중한거란 말이야."
"하, 그렇게 소중하면 과외 끝나고 받아가든지."
"뭔가 선생이랑 제자가 바뀐 것 같은데..."
렌이 중얼거리자 나유타는 곧바로 시끄럽다며 째려봤다. 그제야 렌도 알겠다며 바로 순응하고 나유타의 보컬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나유타의 노래를 들으면 렌도 자연스럽게 같이 노래를 불렀다. 나유타는 원래 자기가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마음대로 화음을 넣거나 같이 노래 부르는 걸 싫어하지만 렌은 예외였다. 렌이 넣는 화음은 완벽했고 더 풍부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하아...하아.... 나유타군 이번에도 멋진 노래였어. 더 이상 가르쳐줄 필요가 없겠는데? 아니지, 원래도 잘했으니까 나 같은 건 필요 없었던 거 아니야?"
"됐어. 그보다 이 수첩 받아가라."
나유타는 렌에게 수첩을 돌려주며 다시 뒤돌아서서 스탠딩 마이크를 잡았다. 또 노래부르게? 조금은 쉬어둬. 렌의 말 따윈 들리지 않았다. 나유타가 스탠딩 마이크를 쥐고 다시 노래를 부르려는 찰나에 렌은 나유타를 말리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첩에 적힌 가사에 본인이 생각한 멜로디를 입혀서 힘차게 노래를 불렀다.
"자, 가자! 한계 같은 말은 떨쳐내고 지금 그 앞으로.
Stand up! 달려! 몇 번이고 Starting over."
그 노래를 들은 나유타는 순간 멈칫했고 렌을 다시 바라보았다. 렌은 하던 노래를 멈추고 수첩을 보여주었다.
"내가 작사작곡한 곡이야. 나유타군을 생각하며 썼어. 어때? 같이 부를 생각이 들었을까?"
나유타는 다시 눈매를 매섭게 뜨며 렌에게서 수첩을 빼앗듯이 집어 들었다. 그리고 가사의 내용을 읽어보았다. 가사의 내용은 나유타가 원하는 음악과 전혀 맞지 않았다. 하지만 렌의 마음이 담겨있는 가사만큼은 확실했다. 나유타는 다 읽은 그 수첩을 다시 버리듯 렌에게 돌려주고는 가차 없이 말했다.
"나랑은 맞지 않아."
"그렇구나. 하지만 난 진심이야. 이걸로 나유타군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싶어. 언제가 되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나와 함께 노래를 불러줘."
-
라이브 무대에 선 두 사람은 그때의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다. 한 번도 같이 맞춰본적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화음을 넣고 있었다. 나유타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화음을 넣은 렌은 이번에도 나유타의 노래에 맞췄고, 나유타도 렌의 가사를 마음대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내질렀다. 두 사람의 화음은 완벽했다. 흠잡을 때가 없었다. 관객들은 두 사람의 듀엣에 열광했고 회장 내 분위기가 달궈졌다. 나유타와 렌의 듀엣이 끝나고 본격적인 라이브의 시작을 알렸다.
"하아....하아.... 나유타군 정말 멋졌어."
"하아... 칫."
나유타는 애써 모른척 하며 자리를 피했다. 분명 렌과의 듀엣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았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라다. 오히려 속이 개운해졌다. 억누르고 있었던 모든 것을 쏟아내어서 한층 시원해졌다. 가슴속에 답답했던 기운이 모두 사라진 걸 느꼈다. 나유타는 렌이 그런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지만 렌과 자신이 이렇게까지 잘 맞을 거란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앞으로 계속 노래 부르자. 같이."
".....봐서."
"응. 고마워."
두 사람은 무대에서 퇴장했고 뒤이어 진짜 주인공인 이류 코가가 나갈 차례였다. 다시 무대 뒤편으로 들어가는 도중에 나유타는 이류 코가와 눈이 마주쳤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지금은 바로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할 상황이었기에 한마디 조차 할 시간이 없었다. 렌은 나유타의 옆에 꼭 붙어서 그의 옷깃을 잡았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나유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했습니다. 그렇게만 하세요."
그 외에도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았지만 스태프들이 그를 애워싸고 어서 무대 위로 올라가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기 때문에 그다음 말은 전혀 듣지 못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방금까지 렌과 둘이서 저 무대에서 그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나유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숨쉬기가 편했다. 렌이 옆에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천식이 잦아든 건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더 이상 천식으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렌은 나유타의 옷깃을 다시 천천히 놓아주며 그의 앞에 서서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현했다.
"고마워 나유타군. 나랑 같이 노래해줘서. 오늘 일은 정말 잊지 못할 거야. 나유타군도 잊지 않았으면 해."
"......."
"꼭 원하는 대학에 가길 바랄게.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 또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렌은 마치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사람처럼 말했다. 실제로도 이류 코가의 의해 해고당한 상태여서 다시는 나유타를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기적적으로 만난 게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마지막이다. 오늘이 지나면 렌은 더 이상 나유타를 보지 못할 테다. 이제 렌은 다시 지루한 대학생으로 돌아가야 했고 나유타도 따분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 으. 미,안해. 흐끅. 웃는 얼굴로 보내주자고 생각, 했는데. 눈물이..."
정말 잘됐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는 렌의 눈에 눈물이 떨어졌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묻자 렌은 울먹이면서 집사가 데려다주었다고 말했다. 그 집사는 오지랖이 너무 넓어서 탈이야. 나유타는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집사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것이다.
"떨어져있어도 마음은 이어져있으니까 언젠가 다시 만나기를 바랄게."
렌은 애써 침착하게 울음을 멈추고 말했다. 나유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렌에게 본인의 스마트폰을 보여주었다. 전화번호라도 받아가려는 생각이었을까 싶어서 렌은 받아 들어서 전화번호를 찍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나유타가 덥석 잡아 스마트폰에 있는 어떤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 뭐야?"
"읽어."
"음.... 카모가와 대학교 실용음악과.... 합격....?"
"저번주에 합격했다. 그러니까-
이제 떨어진다거나 안보겠다거나 그런 말 하지 마."
스마트폰에 뜬 사진은 카모가와 대학 입학시험 결과. 그리고 나유타는 당당히 실용음악과에 합격하였다. 렌이 다니는 학교였다. 렌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쁜 나머지 나유타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를 꼭 껴안아주었다. 나유타는 무슨 짓이냐며 당장 떨어지라고 말했지만 렌에게 그런 말은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카모가와 대학으로 괜찮아? 더 높은 곳을 가고 싶어한거 아니었어?"
확실히 카모가와 대학은 음악으로 유명한 학교는 아니었다.
"착각하지 마. 원래부터 목표는 거기였어."
나유타는 렌의 질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했다. 원래 원하던 대학도 있었고 이류 코가가 가라고 한 대학도 있었지만 그걸 다 포기하고도 렌과 같이 있고 싶었다. 나유타는 렌이 없으면 이런 노래도, 이런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언제까지고 렌과 함께 있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런 노래를 만들 수 있다면 최대한 그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건 핑계고 진짜 마음은 다를지도.
"정말... 잘됐다....흑..."
렌은 또다시 울기 시작했다.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자 나유타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렌에게 다가가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남들에게 차가우면 차가웠지 단 한 번도 따뜻했던 적이 없었던 나유타가 렌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 본인도 어이가 없는지 괜스레 혀를 찼다. 렌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던 나유타는 다시 그를 보고 말했다.
"어이, 울 시간 있나?"
렌은 다시 고개를 빼꼼 들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으응. 이제 다 울었어."
이제 울 날보다 웃는 날이 더 많을테니까 말이다.
"난 나보다 뒤쳐지는 놈은 두고 간다.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언제든지 상대해 주지. 그때 보자. 렌."
"응! 개강날 봐. 나유타."
나유타는 무대 뒤에서 나와 다시 대기실로 돌아갔고 렌은 그자리에서 바로 회장 밖으로 나왔다. 렌을 데려다주었던 나유타의 집에 있던 중후한 집사가 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렌을 마중하기 위해 리무진의 문을 열었다.
"나나호시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타시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걸어갈려고요."
"그러신가요.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나유타 도련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네, 걱정마세요. 나유타군하고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같은 늙은이를 또 찾아주시면 오히려 감사하죠.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네!"
렌은 개운해진 기분으로 리무진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걸었다. 오늘은 도쿄역까지 걸어갈까. 렌은 기분 좋은지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들며 빠른 스텝으로 걸었다. 또다시 나유타를 만날 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