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미키] 흉터 -1
하마미키
[흉터] -불화살 완전편
(2편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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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등에는 닌자의 설움이 새겨져 있다. 시력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등의 흉터는 계속해서 청년의 마음을 갉아먹을 것이다. 대륙의 지도보다 넓게 퍼져있는 흉터에 손을 올릴 때마다 닌자라는 본분이 척수를 타고 올라와 뇌를 깨우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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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핀 푸른 잡 꽃들이 피로 물들어 세상의 종말을 예언하듯 찬란하기가 그지없는 인생이여
허망하게 뻗어있는 꽃가지를 향해 보내는 말 한마디,
찬란하기에 인생이 있고 불쾌하기에 세상이 있을 지어니
거만하게 피어있는 꽃 한송이가 너를 바라보다 수줍게 얼굴을 가리는데
핏기 없는 얼굴을 마주하고 한탄 살이 따위를 하며 허망한 삶을 보내자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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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세요!"
상점가의 꽃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를 않는다. 언제나 싱싱한 꽃들을 가져오고 상점의 청년들도 활기차고 애교가 많아 인기만점이다. 머리를 아래로 낮게 묶은 청년은 꽃집의 주인이면서 다른 주인에게 구박을 많이 당하는 순박한 청년이다. 기분이 좋으면 꽃을 두세 개씩 더 주기도 하고, 애교가 많아 손님들 앞에서 재롱을 부릴 때도 있다. 또 잘 웃기 때문에 상점가의 사람들에게 떡이나 국수등을 받을 때가 많다.
"슈이치로! 너 또 꽃 하나 더 줬지? 제값을 받으라고 몇번을 말해!"
"아직 많이 있으니까 괜찮잖아."
꽃집의 다른 주인은 갈색 머리에 잔뜩 위로 올려묶은 머리가 인상적이다. 째지는듯한 고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까칠하게 굴어 상점가의 사람들은 능청맞은 다른 주인을 좋아할 때가 많다. 융통성이 없게 느껴질 정도로 다른 사람에게 엄격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도 엄격하기 때문에 둘의 사이는 그다지 나쁘진 않다. 목소리에는 애교가 묻어나고 융통성은 조금 없지만 기분이 좋거나 주위사람들이 치켜세워주면 금방 느슨해지는 성격이라 상점가의 사람들은 이쪽을 더 좋아하기도 한다.
꽃집 주인들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마을에 잔치라도 있는건지 꽃을 주문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이 되어서야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이른 아침부터 힘들게 꺾어 온 꽃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 다 팔린 걸 본 청년들은 서로를 마주 보며 슬며시 웃었다. 그리고는 장사는 힘든걸 잘 알기에 청년들은 후 들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벌써 점심때를 놓쳐서 배가 고팠지만 움직일 힘도 거의 없다.
머리를 낮게 묶은 청년의 이름은 하마 슈이치로. 인술학원 졸업생으로 졸업 후에는 닌자들을 모집하여 사적인 닌자대를 꾸렸다. 특유의 익살스러움과 인간미가 넘치는 닌자대였으며 우정과 인연을 중시하는 닌자답지 않은 인품을 지닌 닌자대였기 때문에 동료를 모두 잃고 새시작을 위해 꽃집을 차렸다. 그러나 닌자대의 대장이었다는 표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등에 남은 큰 화상자국이다.
머리를 높게 묶은 청년의 이름은 타무라 미키에몬. 같은 인술학원 졸업생으로 닌자대에 들어갔으나 큰 화를 입고 더이상 닌자대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전히 마음의 문을 닫고 꽃집을 차려 간간이 들어오는 의뢰를 받는 닌자 일을 하고 있다. 꽃집을 차리게 된 계기는 우연히 길을 걷고 있었을 때 마주친 동창 슈이치로를 만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 역시 닌자대를 싫어하는 이유를 잘 알려주는 표식이 있다. 역시 등에 남은 큰 화상자국이다.
슈이치로는 마룻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시원함을 느꼈다. 아저씨같은 모양새지만 그것도 슈이치로의 매력의 일부다. 미키에몬은 슈이치로의 발바닥을 간지럽히며 저리 비키라고 구박을 했다. 예의 없는 걸 절대 못 참는 미키에몬은 슈이치로의 이런 아저씨 같은 모습이 꼴 보기 싫었다. 그래도 새 시작을 위해 꽃집을 차린만큼 너무 구박하진 말자고 다짐했다.
"가끔 꿈에 옛 동료들이 나와. 어리숙하고 힘은 없었던 닌자대지만 유쾌하고 재밌는 녀석들이었어."
슈이치로는 뜬금없이 그말을 하고 대자로 누운 몸을 다시 웅크려 왼쪽으로 돌아 누웠다. 미키에몬은 추억에 잠길 시간이 있다면 꽃이나 더 사 오라며 발바닥을 잡고 잔뜩 간지럽혔다. 슈이치로는 웃음을 못 참고 웃음을 터뜨리며 발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 다시 돌려주겠다며 미키에몬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간지럽혔다. 둘은 피곤하다는 생각도 못한 채 마룻바닥을 뒹굴며 웃었다. 옛 추억에 잠길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며 미래를 생각하며 웃었다.
미키에몬은 닌자대를 혐오했기 때문에 슈이치로의 닌자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골이 아프다. 그러나 저렇게 즐겁게 떠들어대는데 그만 하라고 구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서로가 엉겨 붙어 깔깔 웃으며 간지럽히고 놀았다. 슈이치로가 미키에몬의 발목을 잡아끌어올리자 미키에몬이 크게 웃으며 항복하겠다며 먼저 백기를 들었다. 손에 잡힌 발목이 가늘고 새하얗다.
"밥먹을까?"
"점심 먹기에는 늦지 않았어?"
"저녁 먹어야지. 아침부터 꽃 사 오느라 수고 많았어."
후우. 미키에몬이 숨을 가다듬고 헝클어진 머리와 옷무새를 가볍게 정리하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벌써 이렇게 단둘이 살게 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간다. 1년 사이에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슈이치로는 더 이상 닌자대를 부활시키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미키에몬도 슈이치로를 까칠하게 대하지 않았다.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인사과 성격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슈이치로. 있나?"
"아, 케마 선배다. 잠깐 나갔다 올게."
케마 토메사부로는 이 상점가를 추천해준 논술학원의 선배로, 마찬가지로 이 상점가에서 동네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둘은 학원에 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다. 미키에몬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슈이치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기도 저렇게 선배랑 사이좋게 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시오에 몬지로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미키에몬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피하고 있는 쪽은 미키에몬일지도 모르지만 그쪽에서 자신을 찾아주지 않는 것도 피장파장이다. 슈이치로는 여전히 토메사부로와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닌술학원에 있는 것보다 두 사람은 듬직하게 잘 컸다. 멀리서 보면 형제라고 생각할 정도로 닮아 있었고 열혈적인 부분도 똑 닮았다.
"미키에몬! 우리 나가서 저녁 먹을래?"
"선배랑?"
"응. 선배가 사주신대."
토메사부로와 이야기를 끝마친 슈이치로가 신발을 벗어던지고 마룻바닥에 기어들어가 미키에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미키에몬의 어깨를 감싸잡는 두툼한 손에서 은근한 냉기가 흘러들어왔다. 토메사부로는 멀리서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두 후배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키에몬은 나갈 채비를 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슈이치로도 한껏 들뜬 표정으로 신발을 신으며 현관을 나섰다. 얼마나 들떴는지 옷이 펄럭거리며 속살이 다 보였다. 등 뒤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흉터가 미키에몬의 눈에 밟혔다. 옷 속으로 살살 들어오는 바람의 기운을 느꼈는지 슈이치로도 눈을 살며시 감고 가슴을 쭉 폈다. 심호흡을 여러 번 하니까 등 뒤에 있는 흉터의 형태가 더 잘 느껴졌다. 더 이상 쓰라리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나 흉터가 만들어진 '추억'을 생각하면 할수록 미키에몬과 슈이치로 사이의 경계가 생기는 듯했다.
"우동 먹을래 전골 먹을래?"
"이참이면 비싼 걸로 먹어야죠. 전골이요!"
"저도."
"나참... 사양도 안 하는구만."
흙바닥을 걷는 세사람은 전골집으로 향했다. 고기가 들어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먹을만한 국물요리였다. 토메사부로는 어른답게 두 청년들에게 말을 아끼지 않았다. 병아리처럼 삐약거리는 두 청년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다. 급기야 슈이치로는 큰소리로 웃으면서 배꼽을 잡고 펄쩍 뛰었다. 진정하라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그제야 웃음을 멈췄다. 학원에 있을 때는 훨씬 더 많이 웃고 웃음을 멈출 줄 몰랐는데 지금은 웃음도 현저히 줄어들고 주위에서 멈추라고 하면 바로 입을 닫아버린다. 성숙해진 것은 좋지만 어릴 때의 추억을 더 이상 꺼낼 수 없어서 두 사람 사이에는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다. 토메사부로는 전골집에서 가장 큰 냄비를 시키며 배가 터지게 먹어도 좋다며 기분 좋게 말했다. 같이 딸려온 술병을 보고 토메사부로가 슈이치로에게 술을 권했다. 배시시 웃는 입꼬리가 건치를 세상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술잔의 오목한 바닥 안에 말갛게 차오르는 술의 색깔이 뜨거운 심장을 그대로 보여줄 정도다.
"슈이치로. 한 의뢰를 너에게 맡길까 하는데."
"어떤 일인데요?"
"어렵지 않아. 나는 다른 일이 있어서 갈 수 없게 되어서. 보수는 꽤 높은데 할 수 있겠어?"
"안할 이유가 없죠."
토메사부로는 술을 깨끗하게 한 방울도 흘리지도 않고 한 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할 일이 끝났다는 듯이 옷소매 안으로 팔을 집어넣고는 목소리를 한 번 더 가다듬었다. 길게 뻗은 눈꼬리에는 맹수의 눈빛이 서려있는 것 같다. 졸업 전보다 훨씬 더 늠름해진 면은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 맹렬하고 차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건 슈이치로도 미키에몬도 느끼고 있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를 보고 있으면 백호가 떠오르는 그런 몸을 하고 있었다. 슈이치로에게 상점가를 추천해 준 사람은 이 사람이 맞지만 가끔 보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맹수가 둔갑한 게 아닐까? 슈이치로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배의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케마 토메사부로의 말은 하마 슈이치로에게 있어서 진리나 다름없었다. 이미 앞서서 닌자의 길을 통달하고 있었던 선배의 뒤를 따라갈 뿐이지만 그것마저도 슈이치로에게는 새로운 자극이어서 기뻤다. 선배와 후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시절을 지나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자신을 보듬어 준 것은 동급생인 학우들의 도움도 있었지만 선배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슈이치로는 토메사부로를 더 잘 따랐다.
"그런데 선배는..."
"뭐지."
"이 일을 거절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으신가요?"
슈이치로의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었던 미키에몬이 입을 열었다. 차가운 보석과도 같은 눈을 가지고 있는 미키에몬은 토메사부로의 눈을 응시했다. 맹수와도 같은 모습의 그 케마 토메사부로지만 섬뜩하기 그지없는 저 빨간 눈을 보고있으면 처녀귀신에게 영혼이 빨리는듯한 기운을 느꼈다. 그래. 말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다. 담담하게 말하는 저 모습에서 미키에몬은 미세한 떨림을 읽어냈다. 괜히 시오에 몬지로의 후배가 아니었다. 몬지로와 토메사부로의 싸움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은 동급생이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같이 지내온 위원회의 후배들이기도 했다. 미키에몬은 얇게 뜬 눈동자를 왼쪽으로 굴리며 슈이치로 앞에 놓인 술잔을 덥석 잡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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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포식했다. 그치?"
"넌 마음 편해서 좋겠다."
"모처럼 선배가 사주신거니까 내일 떠나기 전에 선배네 가게에 들러야겠어."
"그러시든지."
상점가 나무 위에서 뻐꾸기가 잔잔하게 연주하는 소리에 발걸음을 맞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슈이치로는 보폭을 미키에몬에게 맞추고 있었다.
"미키에몬, 나 집에 가면 등에 약 좀 발라줘."
".... 그래."
미키에몬을 학교 밖에서 만나기 전에 슈이치로는 닌자대를 만들었다. 과거의 농성의 기억을 더듬어서 만든 볼품없는 아마추어 닌자대긴 했지만 그 안에서 동거동락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등에 깊게 박혀있는 흉터가 커지는 것만 같다. 그야말로 전장은 홍염의 바다였다. 차라리 성의 닌자대였다면 복수라도 해줄 텐데 오합지졸 닌자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살아남은 사람도 슈이치로 한 명뿐이었다. 한때는 닌술학원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것마저 과도한 욕심인 것을 눈치챘다. 지금은 옆에 있는 한 사람이라도 지키는 거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을 한 것은 미키에몬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흉터의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흉터의 깊이가 중요한 것이겠지. 슈이치로는 좀 더 미키에몬의 흉터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지만 그것을 허락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슈이치로는 미키에몬 앞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흉터를 숨김없이 다 보여주었다. 먼저 다가가지 않으면 마음은 열리지 않아. 그렇게 생각한 소년은 멀찍이 떨어져서 '타무라 미키에몬'을 타자화 할 수밖에 없었다.
"옷 벗어봐."
"응."
어렴풋하게 피어오르는 촛대 하나에 의지한채 슈이치로는 스스럼없이 흉터를 보여주었다. 불화살을 맞은 자리에는 '그' 흉터 하나만 자리하고 있었다. 약을 아무리 발라도 좋아지지 않았다. 벌써 그 사건 이후로 2년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해결된 게 없다. 미키에몬은 슈이치로가 장난처럼 말하는 '닌자대'라는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까. 미키에몬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묵묵히 약을 등에 발라주었다. 슈이치로의 원래 피부보다 조금 밝은 색상의 흉터는 정말 눈에 잘 띄었다.
"너도 해줄까?"
"아니. 난 내가 할래."
"등인데?"
"혼자서 할 수 있어."
뒤돌아 있는 흑발의 소년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퍼진다. 미키에몬은 혼자 하겠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연기일 뿐이다. 약을 바른 그 자리에 손을 살며시 올려놓는다. 앗 차가워! 슈이치로가 흠칫 놀라지만 금세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담담하게 손의 온기를 느낀다.
"일을 받아든 이유가 뭐야?"
"닌술을 배웠는데 썩히기에는 아깝잖아."
"케마 선배가 하는 말이면 넌 다 받아 들었지."
"그렇긴 하지만 모처럼 선배가 나를 위해서 마련한 일이잖아."
"난 아니라고 생각해."
미키에몬은 등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옷 입어. 또 아침에 춥다고 칭얼거리지 말고. 약간의 잔소리를 한 후에 욕실로 향했다. 미적지근한 물을 선호하는 편은 아니지만 흉터 때문에 미온수를 쓰고 있었다. 턱끝까지 잠길 정도로 몸을 집어넣었다. 흉터가 무섭다. 흉터가 번질까 봐 무서운 게 아니다. 흉터에 서려있는 선배의 기억이 되살아날까 봐 무섭다. 시오에 선배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렇게 추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츠려 들어 흉터가 몸전체를 잠식해 버린다. 욕조 안에서 미키에몬은 몸을 둥글게 말아 얼굴을 폭 담갔다. 물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편안했다. 익사를 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잠시나마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까지 쩌렁쩌렁 울리는 청년의 목소리에 얼굴을 막 들었다. 소년인가 청년인가. 아무튼 그 경계 어딘가에 있는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조마조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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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자라면 새벽에 일어나서 단련해야한다. 그 말을 한 사람은 케마 토메사부로였는지 시오에 몬지로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슈이치로는 나갈 채비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현관문 앞에서 미키에몬을 기다렸다. 같이 떠나는 건 아니지만 배웅을 해주는 정도는 해주고 싶었다. 미키에몬의 세심한 배려와 이런 따뜻한 마음씨를 슈이치로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아무리 졸업 후에 예민해지고 우울해졌다고 하더라도 심성만은 변치 않았다. 마음이 맞아서 친하게 지낸 것도 있지만 마음보다도 그 친절한 마음씨가 둘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있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알고 있기에 말을 안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아아, 저 순진무구한 소년의 미소가 언제까지고 지속될 수 있으리. 미키에몬은 비어있는 집안으로 들어와 차가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버려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몸이 아픈 병자마냥 몸을 둥글게 말아 방금 떠나간 소년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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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상점가를 따스하게 감싸안은 시간. 미키에몬은 마룻바닥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때마침 나무문이 끼익- 하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미키에몬은 바람이 불어왔을 것이라 생각하여 몸을 일으키는 순간,
"슈이치로...? 왜이리 일찍 왔어?"
"시오에 선배가.... 위독하시대..."
나무문이 덜렁거리며 닫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현관문 앞에 서있는 슈이치로의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하고 잔진이 지속되는 지형처럼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말이 제대로 온점을 찍지 못한 채 현관에서 한 발자국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 기어코 고꾸라져서 나뒹굴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미키에몬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슈이치로는 손을 먼저 올리고는 곧바로 일어났다. 미키에몬은 역시 케마 토메사부로가 우리를 배신한 거라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 사람 말을 너무 믿는 게 아니었어. 이건 함정이야. 그러나 슈이치로는 선배가 일부러 그런 짓을 할리가 없다고 믿었다.
"케마 선배도 가서 볼 수 있었는데 굳이 너에게 준 이유가 뭐겠어. 후배들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오라는 이유 아니겠어? 그런데도 너는 그 사람이 선배라는 이유로 감싸고 돌겠다는거야?"
"케마 선배가 그렇게 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의뢰인에게 가는 길에 우연히 들은 이야기야. 강가로 가는 오솔길에 몸이 불편한 사람이랑 그 사람을 돕고 있는 미인이 있다고..."
미인은 아마 타치바나 센조를 가리키는 것이다. 미키에몬은 답답함에 가슴을 팡팡 내리쳤다.
"그래서 정말로 그 근처로 가봤더니 시오에 선배랑 타치바나 선배가 있었어."
슈이치로의 기척 지우기는 선배들에게 과찬을 받을 정도니까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았다. 빨리 미키에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임무도 팽개치고 돌아온 것이겠지. 그러나 미키에몬은 이 모든 게 선배들의 계략이라고 생각했다. 그 의견을 굽힐 생각도 전혀 없었다.
"미키에몬 어떻게 할거야? 시오에 선배가 있는 곳은 알고 있어."
"안 가."
"어째서? 시오에 선배가 적이기 때문이야? 아니면 적이면서도 후배인 자기에게 호의를 베풀어줬다는 수치심 때문에?"
"선배가 다쳤을리가 없으니까."
미키에몬은 현관을 사이에 두고 슈이치로와 대척했다. 그리고는 목석같이 서있는 슈이치로를 어깨로 밀치고 집 밖을 나섰다.
"어디가!"
슈이치로도 뒤따라 나섰다. 얼마나 빠른 발걸음인지 지친 몸을 지고 있는 슈이치로써는 가까스로 따라잡을 정도였다.
도착한 곳은 역시 목공점이다. 케마 토메사부로가 운영하고 있는 목공점. 미키에몬은 말도 하지 않고 천막쳐져 있는 집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러나 집은 이미 비어있었다. 토메사부로는 물론이고 같이 살고 있는 이사쿠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케마 선배가 나에게 대신 맡겼던 일이니까 다른 볼일을 보고 계신거겠지."
슈이치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히려 미키에몬의 복수심에 불타는 표정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저 친우를 말려야만 한다. 미키에몬은 혀를 차고 다시 집밖으로 나왔다. 두리번거리다 뒷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뒷문에는 빨래거리가 쌓여있었고 약초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것은 이사쿠가 약초를 말리려고 한 것이다.
"미키에몬.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그다음에 생각해도 안늦어. 응? 애초에 집에 아무도 없잖아."
"이거 놔."
"너 적당히 해. 설마 케마 선배가 시오에 선배를 해쳤다거나 일부러 우리에게 그런 걸 보게 하려고 나한테 의뢰를 맡겼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왜 돌아왔는데?"
"뭐야?"
붉은 홍채 밑에 잔잔하게 고여있는 물기가 눈 밑 살갗과 만나 붉어져있었다. 슈이치로는 임무를 마치지 못하고 바로 돌아왔다. 닌자로서 실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게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미키에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면 그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바라던 소식이잖아. 그래서 일찍 돌아온거야."
"내가 듣고 싶었던 건 선배가 닌자대를 그만뒀다는 소식이야!"
미키에몬은 큰소리를 치고 슈이치로의 손을 뿌리치고 약초더미와 빨래더미를 발로 뻥뻥 차며 난동을 부렸다. 평소 하고는 다른 난폭한 모습에 놀란 슈이치로는 몸을 던져 그를 말렸다. 그러나 이미 뒷마당은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대로라면 토메사부로가 돌아와서 둘을 혼낼게 분명하다. 슈이치로는 졸업은 했지만 아직 마음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이전 선배와 후배사이처럼 그때처럼 토메사부로가 돌아와서 엉망이 된 집을 보고 후배들을 꾸짖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 가지 착각하는 게 있다면 더 이상 슈이치로는 닌술학원의 닌타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분명 몸이 아파서 닌자대를 어쩔 수 없이 그만둔거겠지. 안 봐도 뻔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이야. 죽을 때까지 닌자로 살다가 닌자답게 죽겠지. 내가 그 사람의 부고 소식을 들을 때도 이미 죽은 지 3년이 지난 후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
미키에몬이 괴성을 지르며 빨래 바구니를 집어 던졌다.
"사과할 기회도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는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거야?"
어느새 홍빛의 하늘이 사라지고 몽롱한 자색빛의 하늘이 드리운다. 약초가루를 짓밟자 가루가 펑하고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등이... 아파..."
결국 주저앉아서 우는 꼴이다. 슈이치로는 등이 아프다는 말에 한걸음에 다가가 그의 등을 쓸어내려주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서럽게 울지는 않았지만 슬픔에 사로잡혀 우는 것은 어디에 비교할 수 없다.
"집으로 돌아가자. 선배들은 곧 오실거야. 뒤처리는 내가 하고 갈 테니까 먼저 집에 돌아가."
"등이 아프단말이야."
"알아. 나도 알아."
"그걸 생각하면 등이 아파서 죽고 싶은 심정이야."
미키에몬이 슈이치로의 팔을 잡고 그것을 지지대로 삼아 천천히 일어나 보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아, 너무 아파. 아프단 말이야. 이런 말만 반복하는 탓에 슈이치로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내가 업어줄게. 일단 여기 업혀. 집가서 쉬자. 너무 무리했어."
힘없이 축 늘어진 미키에몬을 업는건 쉬웠지만 임무도 하지 않고 돌아와서인지 지친 다리는 물을 머금은 솜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쪽은 슈이치로도 마찬가지지만 그렇다고 친우를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이 정도 아픔은 미키에몬에 비해면 아무것도 아니다. 미키에몬의 몸이 닿아있는 등의 흉터가 살갗이 찢어져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지만 그걸 발견할 틈이 없었다. 등이 축축해서 옷을 벗어보니 그곳에 흥건하게 피로 젖어있었다는 사실은 집에 돌아온 후에 알게 되었다.
미키에몬은 끙끙 앓으면서도 중얼거렸다. 등이 아파. 너무 아파. 어떻게 좀 해줘. 그렇지만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슈이치로는 혼자서는 손이 닿지 않지만 억지로 등의 피를 닦아내며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있는 미키에몬을 바라보았다. 등에서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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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메사부로와 이사쿠는 예상외로 사흘 후에 돌아왔다. 엉망이 된 집을 보고도 그냥 넘어갔다. 이미 후배들이 한 짓임을 알고 있다는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사쿠는 약초를 조용히 정리하고는 모래가루와 약초가루를 모아서 체망에 걸렀다. 그래도 모래알이 조금씩 섞여 들어가서 효능이 아주 좋다고 할 수 없다.
"토메, 나 약초 구하러 다녀올게."
"어어, 그래."
"너도 알겠지만 그 아이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닐 거야."
"나도 혼낼 생각은 없어. 이젠 후배도 아니니까."
이사쿠는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인기척을 내지 않는 것인 닌자의 본분. 유령이 왔다간 것처럼 사라졌다. 토메사부로는 조용히 조각칼을 가지고 나무를 조각하고 있었다. 서걱서걱하는 소리가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사쿠 뭐 두고 갔어?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이사쿠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 말은 조용히 억눌렀다. 죽음을 감지한 노인처럼 젊은이의 손에 들려있는 쇠붙이를 보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궁금한게 산더미일 텐데.
슈이치로."
-2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