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타마/소설

[하치칸] 허구 - 전편

닌란(NINRAN) 2025. 3. 16. 00:17

*예전에 썼던 닌타마 졸업 시리어스 시리즈의 일편

*타케쿠쿠 [그믐의 약속] 이후의 이야기라 그걸 보고 오시면 더 이해가 잘됩니다

 

*이어지는 시리즈

센몬 - 닌자의 길, 정도

타케쿠쿠 - 만월의 약속, 그믐의 약속

하마미키 - 불화살, 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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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치칸
[허구]


***

 

 허구만이 남은 삶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여우 한 마리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두 눈을 번뜩인다.
 사자(死者)는 여우를 쳐다보는데 심장이 찢겨나가는 쪽은 여우가 아니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가


***



 졸업한 후 5년이 지났다. 칸에몽은 헤이스케로부터 편지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걸 눈치챘다. 헤이스케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두부가게를 운영하고 있던 하치자에몽의 소식도 끊겼다. 칸에몽은 어레짐작으로 두 사람이 같이 죽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오하마 칸에몽은 지금도 그 두 사람의 흔적을 찾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쿠쿠치 헤이스케와 같은 반이었던 오하마 칸에몽은 졸업하자마자 들어보지 못한 성에 취직하여 닌자일을 하였다. 헤이스케하고는 편지를 주고받은 지는 꽤 되었다. 졸업하더라도 우리는 늘 이어져있다는 걸 잊지 마. 칸에몽은 졸업식날에 울지 않고 헤이스케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했다. 헤이스케는 칸에몽의 말을 듣자마자 주저앉아 울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헤이스케는 칸에몽보다 우수했고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가 운다는 건 특종이었다. 처음보는 광경에 넋을 놓고 있었던 칸에몽은 그제서야 헤이스케의 등을 두들겨주며 그를 진정시켰다. 

 "편지 꼭 보낼게. 몸 조심해."
 "그래. 잘지내."

 매우 짧은 대화였다.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대화였고 그 이후로는 전부 편지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칸에몽은 닌자를 그만두지 않았다. 헤이스케와 다르게 닌자가 적성에 맞는건 아니었지만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헤이스케처럼 두부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하치자에몽처럼 책임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으름 피우기를 좋아하고 되도록이면 힘들지 않은 쪽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싶어 했다. 성에 들어가 말단부터 시작했다. 괴롭힘도 당하고 동료에게 사랑고백도 받았다. 변태 성주의 눈에 들어 밤시중도 들기도 했다. 처음에는 부당한 일에 화도 내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빈번히 막혔고 그것이 쌓이다보니 점점 무뎌졌다. 총명했던 눈동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염세적으로 변한 성인만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헤이스케와 주고받는 편지는 꼬박꼬박 썼다. 헤이스케에게 답장을 할 때마다 마치 닌술학원에서 수다를 떨던 시절이 떠올라 순진무구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을 받았다. 옛 추억이 생각나 그리워지면 그만 눈물방울을 떨궈, 종이에 가볍게 스며들었다.

 그랬던 헤이스케가 죽었다. 몇달이 지나도 헤이스케로부터 편지가 오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직접 그 동네로 찾아가기 위해 닌자대를 나와서 옛 동료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이 같이 두부가게를 차렸다는 상점가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이 칸에몽을 마중 나와있었다.

 "이사쿠 선배?"
 "칸에몽이구나. 오랜만이야. 올거라고 생각했어."

 상점가에 작게 약방을 꾸리고 있었던 이사쿠는 토메사부로와 함께 산지 좀 되었다고 한다. 토메사부로는 어디 갔냐는 칸에몽의 물음에 이사쿠는 시선을 피하며 옅게 웃었다.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은 나비가 되어 먼 여행을 떠났다고 말해주었다. 꽤나 낭만적인 표현이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두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다. 이사쿠는 모처럼 만났으니 같이 차 한잔이라도 하자며 자신의 집에 칸에몽을 들여보냈다. 꼬릿 한 약재 냄새가 그의 발끝에서부터 스며들었다. 온몸을 찌르는 약재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곳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걸 보면 이사쿠도 보통의 인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소매로 코를 가리며 말을 꺼냈다.

 "그럼 이 상점가에는 이사쿠 선배 혼자 있나요?"
 ".....그렇지."

 잠깐의 침묵. 약 10초정도 뜸 들인 대답이었다. 이 시대에 사람이 죽는 건 흔한 일이다. 하물며 목숨을 거는 일을 하고 있다면 더더욱. 언제 죽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 바로 닌자다. 부모마저도 모르게 죽어야 하는 것이 닌자의 이치다. 칸에몽도 그렇게 배웠고 이사쿠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사쿠가 정이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칸에몽은 여전히 의문투성이었다. 더 캐물으면 답이 나올 것 같았지만 더 말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입을 다물었다. 

 "원래는 훨씬 더 시끌벅적하고 재미있는 곳이었어."

 이사쿠는 대나무 통에서 찻잎을 꺼내 물에 우리며 중얼거렸다. 덜그럭거리는 찻주전자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평소라면 거슬리지 않을 소리인데도 오늘따라 더 거슬렸다. 

 "그 다기(茶器) 예쁘네요. 어디서 사셨어요?"
 
 칸에몽은 분위기를 풀어보기 위해 주전자 얘기를 했다. 잡티하나 없는 새하얀 도자기였다. 주전자에 대해 물어보자 이사쿠가 움찔했다. 그러나 곧내, 바로 술술 이야기하였다. 유명한 도자기 마을에 가서 사 온 비싼 다기라며 칭찬을 늘여놨다. 특별한 재료를 써서 하나밖에 없는 다기라며 소중히 다뤄야 한다며 수다스럽게 말했다. 분위기가 약간 풀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아니었다. 칸에몽은 닌자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다기에 어딘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지금으로선 알 방법도 없었다. 이사쿠가 내온 차에는 약재의 향기가 들어있었다. 많은 일본인들이 마시는 녹차보다 훨씬 쓰고 떫었다. '원래 몸에 좋은 약이 쓴 법이야'라며 웃는 이사쿠의 얼굴도 어딘가 처연해 보였다. 

 "쿠쿠치와 타케야를 찾는 거라면 이 다기 가져갈래?"
 "네?"
 ".....농담이야."

 이사쿠의 농담은 묘하게 소름 끼쳤다. 다기를 받아 들어서 뭐에 쓰라는 건지도 감조차 안 잡힌다. 이 다기에 그 두 사람의 뼛조각이라도 담으라는 뜻일까. 이사쿠는 칸에몽 앞에 다기를 내놓았다가 다시 빼앗아 자신의 품에 넣고 쓰다듬었다. 햇빛이 천천히 약방으로 들어찼다. 햇빛을 머금은 이사쿠의 모습은 흡사 어머니의 자태와도 같았다. 그 다기를 품에 안고 희미한 미소로 눈을 내리 깔자 마치 서구의 종교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부처님 하고는 조금 다른 서구의 향기가 물씬 났다. 분명 서구와 왕래가 잦은 신베라면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겠지만 현재의 칸에몽으로서는 무엇을 형상화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따스한 햇빛을 드디어 느낀 이사쿠가 칸에몽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걸까."

 닌자는 그 어떤 신념하나 가져서는 안 된다. 주군을 섬기는 사용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용인의 신념대로 살아야지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서 살아서는 안된다. 칸에몽은 닌자대에 들어가서 그걸 깨달았고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무엇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래봤자 득이 될 게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쿠는 달랐다. 졸업하고 나서 바로 의료닌자로 전직하여 평생을 살아온 탓에 자신의 신념을 상대방에게 전파하는 건 정말 일상이었다. 하물며 상점가에서 약방을 하고 있는데 상점가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해서라도(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전하는 것쯤이야 쉬운 일이었다. 

 "갑자기 그런 말은 왜 하시는거죠?"
 "칸에몽이라면 알 것 같아서. 사부로와 친했잖아?"
 "사부로라면 그런 생각 안했을겁니다."

 칸에몽은 이사쿠의 말에 사부로의 존재를 생각했다. 같은 위원회에 꽤나 친했던 사이다. 성격도 비슷하고 각 반의 반장이라는 이유로 학급위원회에 소속되어 같이 위원회를 꾸려갔던 동료와도 같은 사람이다. 헤이스케하고는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친구다. 그 역시 졸업 후에는 행방이 묘연해져 지금은 왕래가 끊긴 상태지만 어딘가에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으며 기억 속에서 점차 지워나갔던 인물이다. 지금은 그의 얼굴이 어땠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후와 라이조의 얼굴을 하고 있던 시절이 아닌 진짜 '하치야 사부로'의 얼굴을 봤던 그 기억이.

 "어린이가 너무 많이 죽어."
 "그런 시대니까요."
 "어린이가 죽으면 어른이고 어린이고 누구나 슬퍼하잖아. 조금이라도 그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죽음'을 '나비'로 칭해서 쓰고 있어."
 "그래서 헤이스케가 나비가 되었다고 하셨군요."

 모든 이치를 깨달은 부처는 반열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옆으로 누워 불에 타 죽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이사쿠는 마치 당장이라도 재가 되어 사라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본의 부처처럼, 서구의 여신처럼 이사쿠는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칸에몽에게 어떤 해답을 주고 싶었던 걸까. 

 허구

 생명체는 살아있기에 의미가 있다. 그야말로 생(生)이기 때문이다. 폐에 공기를 집어 넣어 스스로 숨을 쉴 수 있고 밥을 먹어서 에너지를 만든다. 옷을 입든지 말든지 그건 나중의 일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집이 없는 인간들도 많았다. 당연히 옷이 없는 인간들도 많다. 밥을 못 먹는 인간들도 많다. 에너지가 없으면 그들은 결국 죽게 된다. 그건 더 이상 생(生)이 아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는 허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간들이 모두 밥도 옷도 집도 없이 살아가다 죽고 마는데 그들을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칸에몽은 자기도 모르게 신념을 뇌 속에 집어넣었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사쿠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닌자란 종교를 가져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다. 그런데도 칸에몽의 머릿속에는 반열에 오른 부처의 얼굴이, 천을 머리에 쓰고 기도를 올리는 서구의 여신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칸에몽은 이사쿠와의 만남 후에 상점가로 나와 거리를 걸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사쿠의 말대로 시끌벅적한 옛날하고는 많이 달라졌다. 헤이스케에게서 온 편지 내용도 '두부를 먹으면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뿌듯해'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두부가게도 없고 행복한 사람도 더 이상 없다. 허구로 가득 찬 세계에서 종교를 믿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린이가 밥을 먹지 못하여 죽는 이 순간에도 부모님은 부처에게 공양을 올리고 자기 배만 불릴 줄 아는 스님에게 돈을 꿔다 주었다. 옆에 죽어가는 어린이는 보이지 않았다. 

 "칸에몽?"
 
 삿갓을 쓰고 거리를 횡보하는 한 청년을 맞닿뜨렸다. 어쩌면 칸에몽은 이 자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걸 지도 모른다. 이사쿠에게서 들었던 그 신념들이 모두 깨끗이 씻겨져 나가는 기분이 든다. 그야말로 뇌가 씻겨져 나갔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만복의 근원 하나님.... 

 "사부로."


-


 사부로는 졸업하고 나서 바로 라이조와 함께 '쌍둥이 닌자'라는 별명으로 활동했다. 변장의 명인으로 불린 하치야 사부로의 변장 실력은 날로 늘었다. 라이조의 얼굴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의 얼굴로 변장하며 다녔다. 졸업식 날, 사부로는 동급생 모두에게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과 예리한 눈매가 인상적이었다. 라이조를 제외한 동급생들은 모두 그날 사부로의 얼굴을 처음 봤기 때문에 충격에 벗어나지 못했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그 누구도 사부로를 본 사람이 없다. 그도 그럴게 사부로는 라이조와 함께 외딴섬에 있는 작은 성에 들어가서 아주 작은 닌자대를 꾸려나갔고, 그마저도 잘 되지 않았다. 

 사부로와 라이조의 성주는 종교에 심취해있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토착신앙을 매우 신뢰했다. 워낙 작은 섬이었기 때문에 자연재해를 두려워하여 그걸 줄이기 위해 수차례 재물을 올리고 굿을 하며 악령을 퇴치하려고 했으며 닌자들에게도 그 생활을 강요했다. 닌자들은 의도치 않게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 작은 섬에서 전쟁이 일어날 일도 없고 평화로운 곳이라 어딘가에 잠입할 필요가 없었고 당연히 출장을 갈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금물로 가글을 하고 나무신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고 바다신에게 재물을 바쳤다. 사부로는 그런 일이 익숙지 않았지만 거역한다면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기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그만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이런 작은 섬에 누가 오겠나 싶었지만 결국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고 해적과 잘 모르는 성이 서로 연합을 맺어 라이조와 사부로가 있는 성을 침공했다. 그 전쟁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 중 라이조도 큰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가 얼마 못 가 죽고 말았다. 사부로는 이후로 닌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성주는 사부로만이라도 붙잡고 싶었지만 모든 것을 다 잃은 그의 표정을 보니 더 이상 막을 수가 없었다.

 "하치야, 자네는 여기서 무엇을 배웠는가."
 "예 주군. 저는 이곳에서 악령이 가장 무섭다는걸 배웠습니다."
 "하나라도 배웠다면 그것으로 됐다. 부디 몸 조심하고 오래 살길 바라네. 이건 후와의 유골이네. 자네가 가지고 가게나."

 성주는 라이조의 유골함을 내어주었고 그걸 받아든 사부로는 그대로 섬을 나와 긴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무작정 들른 이 마을에서 칸에몽을 우연히 만난 것이다. 

 칸에몽을 만난 사부로는 삿갓을 벗음과 동시에 라이조 분장을 했다. 라이조가 죽은 이후로 그의 얼굴을 따라 할 필요가 없어져, 한동안 본모습으로 지냈는데 다시 라이조를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나자 라이조로 변장한 것이다. 라이조로 변장하더라도 칸에몽은 그가 사부로인걸 단숨에 알아차렸다. 오랜 세월을 알고 지내서가 아니었다. 확실한 닌자의 감이었다. 사부로의 미세한 버릇까지 간파하고 있었던 날카로운 닌자의 감 덕분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사부로는 칸에몽을 보더니 닌술학원에 있었던 그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내밀며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이야. 여행가는 길인데 같이 동행해 줄래?"

 사부로의 제안을 칸에몽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동급생에 성격도 비슷한 두 사람. 여행 친구가 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동행인은 없으터. 칸에몽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손을 내밀었다. 사부로 역시 칸에몽의 손을 맞잡고 그를 끌어당겨 와락 껴안았다. 닌자라면 무릇 자신을 해칠 상대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야 한다. 짧은 포옹을 하는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무기를 탐색했다. 특별히 암살시도를 할만한 물건은 없었다. 포옹 후에는 두 사람은 거리를 잠깐 걸었다. 이 마을에 온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사부로는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에 유명한 두부가게가 있다고 하던데 안보이네."
 "그 두부가게 없어졌어."
 "헤에~ 칸에몽은 이미 여기에 와서 순찰을 다 끝낸거야?"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이 동업했던 가게였으니까."

 칸에몽의 입에서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이 나오자 사부로는 저절로 입을 다물었다. 그 역시 두 사람이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이스케가 칸에몽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것처럼 하치자에몽 역시 사부로와 라이조에게 드물게 편지를 보내며 소통을 하고 있었다. 헤이스케와 함께 가게를 꾸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 이후로 라이조가 죽었기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하치자에몽의 편지를 읽을 짬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잊혀 간 편지의 산더미 속에 하치자에몽의 마지막 편지만을 챙겨서 그 섬을 빠져나온 것이다. 하치자에몽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믐날 밤에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적혀있었다. 그것을 사부로는 단순히 하치자에몽의 터무니없는 낭만 이야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그것이 헤이스케와의 마지막 약속을 이룰 날을 일컫고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밥은 어디서 먹지?"
 "이사쿠 선배가 그랬는데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당고집이 있대. 거기서 먹자."
 "이사쿠 선배도 있어? 그러면 인사라도 할걸 그랬네."
 "나중에 같이 하러 가면 돼. 나도 케마 선배는 아직 못만났으니까."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이 같이 사는 것처럼 그 두사람도 같이 사는구나."
 
 자갈이 가득한 흙길을 걸었다. 달콤한 떡 냄새가 났다. 사부로는 모자를 다시 쓰고 턱끈을 조였다. 모자 사이에 그늘진 그림자 안에서 변장을 했다. 순식간에 생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있었다. 아마 우연히 지나친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얼굴을 본떠서 변장한 것일 테다. 칸에몽은 익숙하다는 듯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갔다. 두 사람은 가게 안에 들어가서 당고와 우동을 적당히 시켰다. 이사쿠에게 들었던 것처럼 이 마을은 꽤나 우중충해져 있었다. 아이들이 있긴 했지만 기운이 없어 보였고 어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조는?"
 "죽은지 좀 됐어. 전쟁 때문에."
 "그렇구나. 전쟁은 정말 참혹하지. 몇 명을 앗아가는지 모르겠다. 아마 분명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도...."
 "그 둘은 전쟁으로 죽은게 아니라고 생각해."
 "왜?"
 "네가 헤이스케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처럼 나와 라이조도 하치자에몽과 간간히 편지를 주고받았어. 녀석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믐날 밤에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쓰여있었거든. 난 그 의미가 뭔지 몰랐다. 하지만 방금 네가 이사쿠 선배와 했던 말을 들어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아. 같이 '나비'가 된 거겠지."

 같이 죽었다는 말을 이렇게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칸에몽은 사부로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말을 아꼈다. 헤이스케의 마지막 편지에는 그런 말 써있지 않았는데. 약속은 하치자에몽이 먼저 한 걸까. 

 "기운이 없구나. 네가 좋아하는 당고인데."
 "동료가 죽었다는 말을 여러번 들었더니 속이 안 좋네."
 "어쩌면 동급생들 중에서는 우리 둘만 남았을지도 모른다."
 
 칸에몽에 비해 사부로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며 당고를 세 개정도 먹었다. 원래대로라면 먹기를 좋아하는 칸에몽이 더 많이 먹을 텐데 그럴 기분이 아닌지 당고는 입에 대지 않고 가락국수를 휘적거리기만 했다. 

 성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언제나 죽을날만을 기다리던 칸에몽에게 죽음이란 내가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죽음 따윈 알 필요가 없었다. 본인의 목숨만을 생각했다. 하루하루가 고통에 몸부림의 연속임에도 오늘도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며 본인의 친구인 헤이스케를 만나기 전까진 절대 죽지 않기로 맹세하며 매일을 버텼다. 드디어 여행을 떠날 수 있게 되어 그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그는 이미 죽고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허구'였다. 

 사부로는 반대로 라이조의 죽음 이후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지진, 해일, 산불 등 거대한 자연재해가 오면 죽음이란 한낱의 실오라기 같은 것에 불과했다. 라이조가 그 자연재해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니지만 전쟁도 자연재해의 일종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라이조 대신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그만큼 생명체란 죽음 앞에 무기력하고 헛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허구'라 여겼다.  

 "케마 선배가 있으면 오히려 잘됐다. 내 표도(鏢刀)를 수리하고 싶었는데. 일어나라. 죽상인 네 얼굴 보고 싶지 않다. 이사쿠 선배가 있는 곳으로 가자. 칸."

 사부로는 간혹 칸에몽과 단둘이 있으면 그를 '칸쨩'이라고 부르거나 '칸'이라고 불렀다. 닌술학원에 있을 땐 나이도 어렸으니 '~쨩'을 붙여도 창피하지 않았으나 이젠 어엿한 닌자이기 때문에 그를 귀여운 애칭으로 부르는 일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사부로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에서 복조리를 꺼내더니 동전 몇 닢을 식탁에 두고 칸에몽의 팔을 붙잡고 가게를 나섰다. 칸에몽은 그날만큼은 사부로가 자신의 '부처님' 또는 '성모마리아'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거리를 달리고 또 달렸다. 이념에 사로잡힌 닌자 두 명이 상점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아를 가진 닌자 두 명이 닌자에게서 벗어나고 있었다. 칸에몽은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사부로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부로가 가지고 있는 이 신념이 닌자에 발목을 잡는다면 가차 없이 그를 죽여야만 했다. 그것이 닌자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칸, 나를 죽이는 일은 이사쿠 선배를 만나고 난 다음에 해."

 한가지 놓친 게 있다면 사부로는 칸에몽의 생각을 다 꿰뚫정도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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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에몽은 오늘로 벌써 이사쿠를 두번 만났다. 더 이상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사부로의 고집 때문에 만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두 번째 만남에는 토메사부로도 있었다. 출장 수리를 갔다 와서 땀을 흠뻑 흘린 그가 사부로와 칸에몽을 보더니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의 어깨를 두들겨주며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었다. 무엇을 고생했다는 의미일까. 이사쿠의 정신 나간 소리를 대신 들어줘서 고생했다는 의미일까. 칸에몽은 이사쿠를 보기 거북했다. 토메사부로만큼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사부로 역시. 

 "선배님들, 죄송하지만 오늘 하룻밤 재워주실 수 있나요?"
 "당연히 된다. 몇일이고 묵어도 상관없으니 마음껏 써라."

 토메사부로는 호쾌하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방을 내주었다. 좁은 방이지만 두 사람이 자기에는 충분했다. 사부로의 무기수리가 다 될 때까지 잠깐 쉬고 있으라며 문까지 닫아주었다. 문을 닫자 불쾌한 약재 냄새도 안 났고 고요함만이 방안에 가득 차있었다. 공기 안에는 살기가 전혀 없었다. 이사쿠는 물론이고 토메사부로도 두 사람을 헤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사부로의 속마음을 읽기는 어렵지만 아까의 포옹을 생각하면 그 역시 칸에몽을 죽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직 칸에몽만이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리는 아직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은데 그동안 못다한 얘기나 할까?"
 "동료 얘기라면 아까 실컷 했잖아."
 "난 네 이야기가 듣고 싶어."

 사부로는 칸에몽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더 가까이서 쳐다보았다. 숨결이 닿을 듯한 그 거리에 놀란 칸에몽이 그를 밀쳐내려고 했지만 사부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칸에몽을 더 강하게 당기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사부로에게 정신을 빼앗기고 말 것이다. 그것만은 사양이다. 

 "이곳에서 살기를 띄고 있는 사람은 너뿐이다. 칸."
 "그렇게 부르지 마."
 "그럼 옛날처럼 칸쨩이라고 불러주리?"
 "그렇게도 부르지 마."
 "못본사이에 많이 까칠해지셨군요. 오하마 공."

 사부로는 칸에몽의 이마를 톡 건드리더니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칸에몽이 단숨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전세가 뒤바뀌었다. 칸에몽은 사부로의 위에 올라타서 목부근에 촌철을 대고 있었다. 죽은 헤이스케의 무기였다. 사부로는 놀랐지만 그렇게 크게 놀라진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여유가 칸에몽의 화를 더 돋웠다. 촌철이 날카로워 사부로의 목에 닿아 생채기를 냈다. 핏방울이 맺혔다. 핏방울이 금세 촌철에 스며들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신념같은건 닌자에게 필요하지 않다. 닌자의 삼 병(三病). 적을 얕보지 않을 것, 고민하지 않을 것, 두려워하지 않을 것.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마지막 병. 생각하지 않을 것. 

 '우리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걸까.'

이사쿠에게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모든건 그 사람 때문이다. 칸에몽은 그렇게 생각했다.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소중한 동급생을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사쿠에게서 종교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어야만이 속이 후련했다. 비록 이사쿠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믿어야만 했다. 

 "칸에몽, 넌 네가 살아있다고 생각하니?"

 사부로마저 그런 말을 했을 땐 더이상 돌이킬 수 없다. 칸에몽의 머릿속에 더 이상 종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절대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칸에몽, 정신차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하나밖에 남지 않은 친구의 설교조차 자신에겐 송곳이 되어 뇌를 콕콕 찌르는 두통의 원인이 된다. 

 "칸에몽, 닌자가 삶에 전부가 아니야. 그걸 알기 때문에 헤이스케와 하치자에몽은 닌자를 그만둔 거다."

 그만 말해. 사부로. 난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우리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을거야. 손을 놔."

 핏방울이 촌철에서 빠져 나와 칸에몽의 손가락까지 침투했다. 검붉은 색의 혈액은 그의 손가락을 더럽혔다. 닌자라면 항상 보던 피를 지금 와서 다시 보니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전장에서 죽은 사람들의 환영이 보이는 듯했다.

 "우욱......."
 "괜찮으니까 천천히 숨 셔."

 머릿속이 매우 어지러웠다. 속이 메스꺼웠다. 칸에몽의 위에는 나비가 들어앉아있었다. 헤이스케의 망령, 하치자에몽의 망령, 라이조의 망령이 내려앉아서 자신의 위장을 괴롭히고 있었다. 손에서 놓은 촌철이 팅-하고 튕겨져 나가 바닥을 나뒹굴고 칸에몽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꺽꺽 숨을 몰아쉬었다. 사부로는 자신의 목부근을 지그시 누르고 다른 손으로는 칸에몽의 등을 쓸어주었다. 

 "세상은 허구로 가득차있어. 라이조가 죽은 것도 난 허구라고 생각한다.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텅 빈 무언가에 불과한 이 세상을 내가 채운다고 한들, 좋아지지 않아. 전쟁은 계속될 거고 사람들은 계속 싸우겠지. 희생은 반드시 나오기 마련이다."

 사부로는 고개를 돌려 창가 너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들을 바라보았다. 작은 들꽃이었다. 알록달록한 색깔들이 잡초처럼 드문드문 피어있었다. 아이들은 그 들꽃을 고사리같은 손으로 꺾어서 가지고 놀았다. 가지고 논 들꽃은 시들어버리고 어느새 아이들의 손에서 빠져나가 흙길에 버려진다. 더러워진 꽃잎은 하나둘씩 뜯겨나가 바닥의 양분이 된다. 

 "살아있다는 건 그런 의미라고 생각한다. 네가 생각하는 삶은 어떤거지?"
 
 칸에몽은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많으면 많을수록 두려움에 떨게 되고 그 두려움은 커져서 사는 것조차 두려워진다. 내일은 무엇을 먹어야 하지, 내일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숨을 못 쉰다는 건 어떤 기분이지, 물속에 오래 있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들이 뇌를 지배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삶 자체에 영향을 주게 된다. 닌자의 삼 병은 두려움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그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삶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논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나 다름이 없어진다. 들꽃이 시들어 흙길에 뿌려지는 것 마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칸에몽은 흙길에 버려진 꽃잎보다 꽃잎을 뜯다가 무사에게 죽임을 당한 어린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아있다는 건 허구 그 자체다."

 그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칸에몽에게 살아간다는 건 의미가 없는 허구일 뿐이다. 

 

-후편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