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나 단편 모음
**계속 추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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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나유렌나유 [악몽]
아사히 나유타는 악몽을 꾼다.
꿈 내용은 항상 같다. 침대에서 누워있는 자신 위로 누군가가 올라온다. 처음에는 가위에 눌린건가 싶었지만 그 형태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좋은 아침이야. 나유타."
나유타의 위에 올라와 싱긋 웃으며 말을 거는 귀신은 달콤한 말로 그를 꼬드겼다. 밤하늘을 담아둔 것 같이 푸른 머리색, 그 밤하늘에 콕 박혀있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 부드럽고 상냥한 얼굴. 그건 모두 나유타가 좋아하는 사람을 닮아있었다. 아니, 그 라고해도 믿을만큼 똑같이 생겼다.
"....내려와라."
"왜? 진짜 애인이 아니라서 싫어? 얼굴은 똑같이 생겼잖아. 목소리도 똑같고. 네가 싫어할만한 요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나유타의 가슴팍에 엎드렸다. 눈과 눈이 마주치고 밝게 빛나는 그 보라색 눈동자가 나유타를 쳐다보았다. 소름끼친다? 기분 나쁘다?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해줬으면 바랐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사히 나유타는 악몽을 꾼다.
점점 그 악몽의 형태는 더 세세하게 발전해간다. 처음에는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따라한 것에 불구하지만 어느순간 그 악몽의 가운데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오늘도 와줬구나. 기뻐."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시점에서 더이상 이건 악몽이 아니다. 나유타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요염하게 웃는 그의 미소를 보고있는 것조차 피곤한 일이다. 손을 뻗으면 그의 뺨에 닿았다.
"나유타군의 손 차갑다. 시원해서 기분 좋아."
제대로 나유타군이라고 말하고 있어. 갈수록 더 똑같아지는 그모습에 그만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아사히 나유타는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만큼은 손대지 않기로 맹세했건만 역시 그건 지켜지지 않았다. 흠뻑 젖은 베갯잇을 보고 나서야 드디어 악몽의 바퀴에서 벗어났단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유타군 괜찮아? 땀을 많이 흘려. 나쁜 꿈이라도 꿨어?"
천천히 숨을 몰아쉬면 눈 앞에 보이는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있는,
나나호시 렌.
렌이 손을 뻗어 나유타의 뺨을 만져서 그의 안색을 살피면 그만 꿈속에서의 일이 떠오르고 만다. 괜찮다고 말하고는 손을 뿌리쳐서 침대에서 일어나 차가운 바닥을 맨발로 걸으면 드디어 현실로 돌아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렌은 다시 가녀리게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
"오늘 하루도 잘부탁해.
나유타."
아사히 나유타는....
끝나지 않는
악몽을 꾼다.
* * * * *
02
나유렌 [상사병]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온몸에 힘이 없는 날. 잘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힘이 빠지는 날.
그리고 너를 보면
전기가 흐르듯 갑자기 무서워져서
주저앉게 되는 날.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그 말은
사랑해, 좋아해, 고마워 같은 달콤함이 아니야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간절한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
날 좋아해 줘
그날도 평범한 하루 중에 하나였다. 평소처럼 신곡 녹음을 하고 친구들과 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쯤 죽어있었겠지. 아니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보냈을 거다. 지금은 아니지만.
"렌, 이 노래 가사는 어때? 한번 불러봐."
"응."
와타루는 진지한 표정으로 샤프의 뭉툭한 부분을 입술에 가져다 대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곡도 리오가 작곡하고 와타루가 작사를 했다. 리오의 섬세한 음률에 맞춰서 상냥한 가사를 쓰는 와타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나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 곡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도 나만이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솔직히 믿어지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하지만 두 사람이 열심히 만든 노래를 망치는 게 아닐까 싶어 자신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물론, 유우토와 반리도 등을 두드려주며 '할 수 있다'라고 말해주었다. 덕분에 이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괜찮은 것 같은데?"
"더 손봐야 할 곳은 없어? 부르기 어려운 단어라던가."
"음... 딱히 없어. 와타루가 쓰는 가사는 늘 상냥하고 따뜻하거든."
"그렇게 말해주니까 뭔가 쑥스럽네. 그럼 곡은 여기서 마무리 짓자. 렌도 오늘 수고 많았어."
와타루는 완벽주의가 있어서 항상 나에게 마지막 컨펌을 받는다. 나는 늘 괜찮다고 말하지만 와타루는 사소한 거라도 좋으니 말해달라고 해서 조금은 곤란하다. 와타루의 가사는 정말 손볼 데 없이 완벽한걸.
"그러고 보니 오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응? 아 맞다!"
오늘은 나유타군이랑 만나기로 한 날이다. 내가 이걸 까먹고 있었다니 그 정도로 신곡에 열중하고 있었나. 급하게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문에서 신발을 꺾어 신자 덜커덩하고 현관문이 열렸다. 그 앞에 서있는 작은 키의 반리가 나와 부딪혔다.
"아얏!"
"아야야...!"
꽈당-하고 부딪혀서 내가 뒤로 넘어갈뻔한걸 반리 옆에 있던 유우토가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는 길이었다. 유우토의 손에는 하얀색 봉투가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건장한 성인 남자 5명의 소중한 식량들이다. 그다지 아프진 않지만 마음이 급한 나머지 허둥대며 신발을 제대로 신지도 않은 채, 현관문을 나섰다. 유우토는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도 조심하라며 걱정하는 투로 말한 게 귀에는 들렸지만 금방 다른 쪽 귀로 흘러나갔다. 내가 무슨 아이도 아니고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렌군~ 차 조심해~"
"나유타한테 이리저리 휘둘리지 말고!"
"저녁 먹기 전에는 돌아와~"
"나나호시 몫의 카레는 남겨놓을 테니 걱정 마라."
-
약속장소에 다다르면 눈으로 나유타군을 찾게 된다. 먼저 도착했을까? 아니면 조금 늦게 오려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만 해도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것과는 다른 떨림. 그건 모두 너를 만난 후로 달라졌어.
"헉... 헉... 이 근처였는데..."
친구들 말대로 조금 더 차를 조심해서 다녔더라면 이렇게 숨이 가쁘진 않았을 거다. 오는 길에 차에 치일 뻔하기도 하고 고양이 꼬리를 밟아서 쫓기기도 했지만 그런 건 잠시 담아두고, 지금은 나유타군을 찾는 게 더 먼저다.
"이봐."
낮게 울리는 음색이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귀에 들린 음색은 금방 뇌로 전달되었다. 몇 번이고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인데도 들을 때마다 진정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은색의 머리카락은 당장이라도 하늘로 솟구쳐 오를 것처럼 솟아나있었다. 날카로운 눈매 안에 콕 박혀있는 빨간 눈동자는 한순간의 떨림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심하게 동공이 떨렸다. 심장이 두근댄다. 오른손을 심장 부근에 가져다 대었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마치 나유타군에게 들릴 것 같다.
"나유타구...."
"...!? 어이! 정신 차려!"
입이 바싹 마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눈앞이 빙글빙글 돌고 머리가 어지럽다. 좋아하는 사람이 앞에 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온몸에 피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빠르게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아버렸다. 주저앉기만 하면 다행이게, 흐릿한 시야에서 보인건 당황해하는 너의 얼굴이다.
머리는 무척 어지럽고 심장은 너무 빨리 뛰어서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손발이 저려서 움직일 수 없고 말을 하려고 해도 목구멍 안에서 꽉 막혀서 나오질 않았다. '좋아해', '사랑해' 그런 말을 전하고 싶은 것도 아닌데 그냥 평범하게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인데 그것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목 뒤가 뜨겁다. 몸이 으슬으슬 추운 건 아니지만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간신히 뜬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면 그 앞에 보이는 것은,
"나... 유타... 군...."
"말하지 마. 몸이 안 좋으면 나오질 말던가 해라. 괜히 나와서 귀찮게 하지 말고."
"으응...."
나유타군은 상냥하다. 지금도 쓰러진 나를 부축해서 아르고나의 셰어하우스로 데려가준다. 가슴이 콩닥거려. 숨이 가빠진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데도 좋아한다는 말도 할 수 없어서 나만 괴로운 상태로 있는 거다. 손끝까지 전달되는 뜨거운 열이 너의 뺨에 닿으면 그제야 눈치챈다. 뺨에 닿은 손을 맞잡아준 너의 손에 내 열기가 닿은 것 같아.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사랑하는 마음이라 닿질 못하는 거야.
-
"나나호시는 어때."
"지금 침대에 막 눕혔어.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분명 나갈 땐 건강했어. 또 네가 뭔가 한 거 아니야?"
"그렇게 걱정되면 나가질 못하게 막던가 해라."
"아니 뭐야?! 역시 아사히 네가 뭔 짓 한 거지!"
"워워, 와타루 진정해. 나유타 네가 렌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어. 렌도 분명히 그만큼 널 좋아할 거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진 않을게. 하지만 매번 이러면 우리도 곤란해. 너도 같은 보컬이면 알 거 아니야."
"......"
"여기서 침묵하기냐..."
방 밖에서 친구들의 실랑이가 들린다. 다행히 귀는 막히지 않아서 잘 들린다. 나유타군이 잘못한 게 아닌데 친구들은 곧잘 오해하고 만다. 그것도 아마 내가 매번 이렇게 쓰러지고 기절하기 때문이겠지. 친구들에게는 항상 미안하다. 나유타군과 만나고 나면 항상 몸이 안 좋아져서 이렇게 실려오기 십상이다. 오늘도 난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또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고개를 돌려보면 협탁 위에는 물컵이 하나 있었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면 조금 나아지려나. 컵을 받아 물을 마시려는 순간,
"어이, 나나호시."
"우웁...! 콜록콜록!"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너였다. 단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다가왔다. 와타루와 유우토가 자기들도 들어가겠다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지만 간단하게 무시하고 방문을 걸어 잠갔다. 밖에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게 이 안까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나나호시."
정전기가 오른 것 마냥 빳빳하게 오른 은색의 머리는 중력을 무시하고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불에 활활 타고 있는 그 매서운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낮게 깔리는 음색이 날 잡아먹으려 하는 것 같았다. 가슴이 콩닥거려. 손끝에서부터 몸이 저려온다. 그럼에도 나의 눈은 너를 선명하게 바라보고 있어서 도망치는 것 따윈 생각할 수 없다. 몸이 얼어붙은 것 같아. 다시 기절해버리고 싶다. 이대로 침대에 누워버려서 모르는 척 피하고 싶다.
"제대로 대답해라."
"뭐, 뭐를..."
"병이 있으면 지금 말해. 아는 병원을 소개해줄 테니까."
침대에 딱 붙어있는 나의 손목을 끌어 잡아당긴 채 낮게 읊조렸다. 그 음색에는 걱정이 담겨있었다. 답지 않게 눈썹을 찌그리기도 하고. 눈매는 갑자기 선해졌다. '혹시 이 녀석도 나처럼 몸이 안 좋은 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병이라도 있으면 너한테 어리광을 부릴 텐데. 아프다고 말하고 너한테 간병을 받을 텐데. 그런 발칙한 생각을 하고 실행에 옮길 정도로 요령이 좋지 못해서 곧이곧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난....."
-
"상사병?"
"지금 렌군의 증상을 보면 딱 들어맞아. 렌군이 항상 몸이 안 좋은 건 나유타를 만날 때잖아."
"상사병이라면 그거잖아? 사랑하는 상대가 있는데 마음을 전하지 못해서 무척 그리워하는 거. 영화에 자주 나오는 거지?"
"고료 말대로 영화에 자주 나오는 거지만 그런 게 정말 있어? 영화 속에만 나오는 드라마적 허용인 줄 알았는데."
"흐음. 만약 렌이 정말 상사병이라면 나유타랑 단둘이 두는 게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왜?"
"그야, 나유타도 상사병을 앓고 있잖아."
-
재깍재깍. 시계소리가 너무 잘 들린다. 그 정도로 이 방에 소음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나유타군이 방 안으로 들어온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시계를 보려고도 하고 딴짓을 하려고도 해 봤지만 금방 제지당했다. '내 말에 대답해', '다른 곳에 눈 돌리지 마'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입은 움직이고 있지 않아도 눈으로 언어를 전달할 수도 있는 건가. 정말 나유타군은 대단하구나.
"나유타군은 어떤데?"
"뭐가."
"나랑 만나는 거."
"...... 싫으면 애초에 만나지도 않았어."
나유타군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용기를 내어 한두 마디 내 마음을 담아 말해봐도 돌아오는 말은 애매한 대답이다.
"나는 말이야. 너를 보고 있으면 심장이 막 뛰어."
"심장이 안 뛰는 사람도 있나?"
"으음... 그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이쪽은 엄청 힘내서 고백하고 있는 거라고. 눈치 쳐줘.
"그리고 식은땀도 엄청 흘러. 온몸이 경직된 것 같다가도 순식간에 힘이 풀려버리고 참 이상하지?"
"나나호시."
"응?"
"제대로 말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아...."
안돼. 이대로라면 정말 숨길 수 없게 되어버린다. 너를 향한 마음도 다 들킬 거야.
"난...."
"네가 말하기 싫으면 나부터 말하겠어."
"무, 무슨 말을...."
그렇게 말한 너의 얼굴이 조금 발그레져있었다. 석양 탓인가? 붉은 끼가 보였다. 나의 손을 잡아당겨 너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었을 땐 많이 놀랐다. 너하고 닿는 것만으로도 이쪽은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 너는 용케도 멀쩡하구나.
"심장이 뛴다, 식은땀이 흐른다, 몸이 경직되다가 풀어져버린다. 그런 거 모두 나랑 같은 거다. 이렇게까지 해도 모른다고 발뺌하진 않겠지. 나랑 너는 같은 마음이야. 알아들었어?"
"아..... 에....?"
닿은 가슴에서 콩닥거리는 심장소리가 전해진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나유타군의 체온이 나의 심장에 닿았다. 맞잡은 손이 아파, 나유타군.
"그,그만해애...."
"그럼 여기서 증명해 봐. 너랑 내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어,어떻게 증명하는데...."
"고백이라도 해보라고."
고백 같은 걸 어떻게 해. 난 너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터져 죽을 것 같은데. 간신히 정신줄을 잡고 있는 건데도 너는 나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는다.
"좋아....."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그 말은
"좋아해? 사랑해? 그런 낭만적인 말만 하지 말고 진짜 너의 마음을 말해라."
사랑해, 좋아해, 고마워 같은 달콤함이 아니야
"나유타군....."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간절한 이 한마디를 전하고 싶어
"날.... 좋아해 줘."
-
방에서 그렇게 많은 말을 나눈 건 아니다. 나유타군은 원래도 말주변이 별로 없고 나도 말재간이 좋은 편이 아니니까. 다만 그날은 오랜만에 많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알 수도 있었고 나도 이제 답답함을 물리칠 수 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전하지는 못했지만 나유타군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상기된 그 얼굴에 피어오르는 애정이 눈에 잘 보였다. 애정이 한가득 담겨 있는 그 눈동자에 선명하게 비친 상대방의 얼굴. 나유타군에게 닿고 싶어. 그런 생각으로 뻗은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그대로 안겨졌다. 그다음의 기억은 별로 없다. 나의 마음이 너의 마음과 같다는 것 빼고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
"그래도 나유타군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서 다행이야."
"난 너와 정말 같은 마음이 아니야."
"그럼 뭔데?"
"정복감."
"정복....에?"
정복감, 독점욕, 그런 단어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지금 알았다. 물론 그것은 다음의 문제다.
-end
* * * * *
03
나유렌나유 [태어나줘서 고마워]
처음 나유타를 만났을 해에 렌이 준비한 선물은 원두였다. 그마저도 렌이 주고 싶어서 준 것이 아니라 어떤 걸 선물해야 할지 막막했을 때 나유타와 같은 밴드 멤버인 켄타가 조언해 주어서 간신히 마련한 것이다. 그 선물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아닌 건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지만 결국 나유타는 그 선물을 받았고 렌과 함께 수업도 들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고 또 다시 돌아온 나유타의 생일. 렌은 근사한 생일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본인의 센스가 꽝인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 준비한 선물이 마음도 전해지고 나유타도 좋아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생각 끝에 정한 건 수제 케이크. 렌은 요리치라 그 쉬운 컵라면도 제대로 못 끓이는 사람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는 케이크만큼은 반드시 맛있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워낙 요리를 못한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기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이번에도 도움을 요청해야지. 렌은 결국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불러 모아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디저트라면 나한테 맡겨. 근사한 케이크를 만드는 방법을 알려줄게."
"요리라면 내가 더 자신 있다. 나한테 배워라 나나호시."
"잠깐잠깐! 이 집의 가계부는 내가 쓰고 있다는거 몰라? 내가 알려줄게 렌군."
저마다 자신을 골라달라며 자랑을 늘어놓는 친구들을 보며 렌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나유타군이 축하를 받았으면 좋겠어. 본인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렌은 온통 나유타 생각뿐이었다. 무슨 케이크를 만들까? 애초에 케이크는 좋아할까? 사소한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이 마음이 전해지지 않더라도 나유타가 생일을 마음껏 만끽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곧이어 케이크 만들기에 돌입. 한두 번은 실패할 수 있어도 열 몇번을 실패하는건 문제가 있는 거라. 리오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와타루의 입맛대로 열심히 친구들을 따라가 케이크를 만들었지만 결과물은 참담했다. 한두번은 새까맣게 태우고 세네 번은 아예 안 익고. 마침내 제대로 구워졌구나 싶었을 땐 생크림이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서 또 실패했다. 도중에 잘못 만들어진 케이크들은 유우토가 먹었다. 하지만 렌은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할 줄 모르는 성격이어서가 아니었다. 소중한 사람의 생일인데 이 정도도 못해주랴. 렌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이제 데코만 하면 되겠다."
"생각해 둔 거 있어? 아니면 평범하게 장식품을 꽂을까?"
"렌군이 하고 싶은 대로 하자."
이윽고 케이크가 완벽하게 구워지고 생크림도 아주 예쁘게 올라갔다. 그렇다고 해서 이 케이크가 파는 것처럼 반짝반짝하게 만들어졌냐면 그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럭저럭 봐줄 만하다' 정도다. 이 케이크가 나유타의 마음에 들지 안 들지 조차도 예상이 가지 않는다.
"초콜릿으로 장식할래."
렌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고 렌을 제외한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대신 자기네들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초콜릿마저 실패를 한다면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더 끔찍해서 친구들은 렌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다. 렌은 초콜릿 판에 한 글자 한글자 정성스럽게 작성했다.
"다 됐다!"
뺨에는 초콜릿 얼룩이, 소매에는 탄 자국이, 얼굴은 땀범벅이고 체력도 재료도 바닥을 드러냈지만 렌은 드디어 만들었다는 사실에 무척 기뻤다. 이걸 이제 나유타군에게 가져다주기만 하면 돼. 렌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케이크를 만들고 케이크 상자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젠 배달할 일만 남았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렌을 떠나보내는 친구들의 모습이 흡사 아기 오리를 강가에 내둔 어미 오리 같았다. 만약 그 케이크를 나유타가 못 먹는다고 한다면 렌이 얼마나 실망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나유타군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아얏!"
"아앙? 너 뭐야? 눈 똑바로 뜨고 다녀!"
"죄, 죄송합니다...."
급하게 길을 나선 렌과 맞닥뜨린 건 나유타가 아닌 근처 불량배였다. 덩치가 렌보다 훨씬 큰 불량배가 그에게 겁을 주면서 눈을 치켜뜨자 렌은 놀라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예쁘게 장식된 케이크 상자도 바닥에 떨어졌다. 케이크가 바닥에 떨어진 걸 본 렌은 급하게 다시 주워서 안을 살펴보았지만 이미 한 번 떨어진 케이크는 엉망이 되어있었다.
"이런 케이크 나유타군이 받아봤자 싫어할게 뻔해.... 이번에는 시중에 파는 걸 주고 다음에 다시-"
"어이."
어째서 항상 렌이 있는 곳에 나유타가 나타나는 건지 모르겠다. 서로의 셰어하우스도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연습시간이 겹치는 것도 아닌데 운명적인 이끌림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운명을 가장한 우연이 있는 것인지 나유타는 렌이 있는 곳에 늘 나타났다. 이번에도 렌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걸 보고 말을 걸었다. 렌은 급하게 본인의 케이크를 숨기고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렸지만 나유타는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네 뒤에 있는 그건 뭐야."
"이, 이거? 별거 아니야! 그냥 좀...."
"똑바로 말해."
"......."
나유타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모든 걸 태울 것 같은 홍염의 눈동자가 보인다. 불꽃을 집어삼킨 그 눈이 렌을 보고 있으면 렌도 언젠가 그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신도 타버릴 것 같았다. 그것이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나유타의 매서운 눈빛에 결국 렌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이 케이크가 나유타를 위해 만들었고 보여주려고 하는 찰나에 사람과 부딪혀서 쓸모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유타는 렌의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케이크를 달라고 했다. 렌은 주기 싫다며 버텼지만 나유타가 인상을 쓰자 어쩔 수 없다며 꼬리를 내린 강아지처럼 쭈뼛쭈뼛 케이크를 건네주었다.
"난 단거 안 먹어."
"알고 있어. 그래서 최대한 안 달게 만들었어."
"쓸데없는 짓 하긴."
"안 먹어도 돼...! 역시 별로지? 이번 꺼는 없는 걸로 하고 다음에 더 근사한 걸로-"
"됐어."
"응?"
"먹겠다고."
나유타는 케이크 상자에서 찌그러진 케이크를 꺼냈다. 그 케이크 한가운데에는 렌이 초코펜으로 글자를 적은 초콜릿 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케이크의 다른 면은 모두 찌그러지고 크림이 상자에 묻어서 먹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 초콜릿 판만큼은 멀쩡했다. 초콜릿 판에 새겨진 글자는 생일 축하해, happy birthday 같은 단어가 아니었다.
'태어나줘서 고마워, 나유타군'
나유타는 그 초콜릿 판만 뽑아서 오독오독 씹어먹었다. 확실히 덜 달았다.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리오의 레시피가 정답이었다. 나유타가 초콜릿을 먹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렌은 그가 케이크를 먹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역시 데코를 하는 게 정답이었어. 케이크 자체를 먹은 건 아니지만 그 장식이라도 먹은 게 어디야. 렌은 슬며시 웃었고 나유타는 렌의 웃음을 보고 귀찮아졌는지 다시 케이크를 렌에게 건넸다.
"나유타군 케이크 더 안 먹어도 돼?"
"난 단거 안 좋아해."
"그거 아까도 말했는데..."
"나머진 버리든지 먹든지 해. 난 간다."
나유타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렌과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무언가 용무가 있어서 이쪽에 온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길을 가던 도중 렌이 보였으니까 다가와서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유타는 길을 걸으면서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핥았다. 칫, 역시 너무 달아. 나유타의 중얼거림이 선선한 9월 바람을 타고 날아가 렌을 스쳤다. 혼자서 길을 걷고 있는 생일의 주인공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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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아케보노 료 독백 [상냥한 지구인]
"일렬종대로 서라. 지금부터 '지구'에 가는 사람을 뽑겠다."
"1!#^%#@#$$#^ㅃ@#$$#^&$#"
"조용!"
지구인의 언어를 할 수 있는 교관은 우리를 모아두고 '지구'로 파병가는 사람을 뽑았다. 그 누구도 지구어를 몰랐기 때문에 알아듣지 못하자 교관은 다시 우리 별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제서야 나의 '동료'들은 이해를 하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자리에 섰다. 지구에 간다는 것은 그만큼 엘리트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 별의 언어로 하면 $#@~%#라는 뜻.
"모두의 체력,지력, 상황대처 능력을 확인해본 결과 지구에 가는 사람은 후보 67번으로 정해졌다. 후보 67번, 네가 앞으로 지구에서 쓸 이름은 '아케보노 료'다. 우리 별의 사명을 잊지 마라. 모든 별에 웃음과 행복을 전파하는거다."
그렇게 나는 지구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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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별은 물과 풀이 가득하고 깨끗한 자연이 매력적인 곳이다. 우리별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은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어떤 종족이라고 정의내리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들을 '사람'이라고 불렀다. 동물, 식물 모두 상관없었다. 모든 생명체는 말을 할 수 있었고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할줄 알았다. 지구인은 고기와 채소를 먹으면서 에너지원을 충족하지만 우리별 사람들은 동물과 식물을 먹는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들도 엄연한 생명체기에 목숨을 앗아가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별 사람들은 지구에서 먹는 간식인 칼로리바와 비슷하게 생긴 음식을 먹으며 에너지를 충족했다. 아무맛도 안나는 음식이지만 태어나자마자 한 음식만 먹은 탓에 맛같은건 느낄 필요가 없었다.
자연은 아름답고,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존중하며 살아가는 아름다운 별이다. 그런 별에서 떨어져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다. 더군다나 '지구'는 우리 별과 전혀 다르게 폭력과 살인이 극악무도하게 일어나는 곳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내가 지구로 가게 될줄이야... 교관도 너무하네. 그런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지구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켄켄이다. 지금의 쟈이로악시아 리더인 '사토즈카 켄타'. 지구에 처음 왔을때 만난 친구였고 지금도 나를 이해해주는 소중한 친구다. 지구에 도착해서 부모님께 안부의 편지를 쓰고 있을때 켄켄은 나를 발견했다. 다른 지구인들처럼 '기분 나빠'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나를 이해해주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는구나. 나도 그래. 신경 쓰지 말고 쓰던거 마저 써."
편지를 다 쓰고 종이비행기를 만들어 하늘을 향해 날리면 비행기는 쭉쭉 날아올라 사라지고 만다. 제대로 배달되었다는 뜻이다. 켄켄은 그 종이비행기를 보더니 눈이 동그래져서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떻게 한거냐며 믿기지 않는 얼굴로 다급하게 물어봤지만 나는 그저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우리 별 사람이라면 다 할줄 아는 마법이야."
먼저 나에게 다가와준 켄켄에게 더이상 우주인이라는걸 숨길 필요가 없었다.
-
켄켄을 만나고, 레온과 미유키를 만나고, 나유타를 만났다. 신기한 기분이었다. TV라는 신기한 컬러 상자에서는 살인사건을 말하고 있는데 내 옆에 있는 지구인들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고향별 사람들처럼 친절하고 상냥했다. 모든 지구인이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켄켄을 통해 알 수 있었지만 내 옆에 있는 지구인들은 다 멋지고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다 같이 징기스칸을 먹고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만들었다. 소리가 합쳐져서 웅장한 합음이 되면 그것이 음악이 된다. 나유타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음악이라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건지 알게 되었다. 고향별에서 이미 훈련을 받고 와서 모든 분야를 섭렵한 덕분에 베이스도 금방 배웠지만 단순히 현을 튕기고 손을 마음대로 놀리는 것밖에 지나지 않았다. 지구인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들어야하는데 정작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나유타의 음악은 지구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그래서 나유타를 따르기 시작했다. 쟈이로악시아에 들어가게 되었다. 모든 지구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별의 사명은 모든 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우리 별처럼 평화롭고 살인과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완벽한 이데아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 지구도 언젠가는 우리 별과 같아질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임무는 끝나겠지. 언젠가 헤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너희들은 모두 행복해서 해맑게 웃고 있을 것이다. 우리 별 사람들처럼. 그리고 더이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 별 사람들처럼. 동물과 식물을 먹지 않을 것이다. 우리 별 사람들처럼. 다음 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지구인을 파병보낼 것이다. 우리 별 사람들처럼. 칼로리바만 먹게 되어 미각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 별 사람들처럼. 칼로리바를 다 먹고 나면 식량이 떨어져서 같은 지구인을 먹게 될 것이다. 우리 별 사람들처럼. 결국 멸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 별처럼.
그러지 않기 위해 최대한 멀리,
최대한 오래,
이곳에서 머물 것이다.
쟈이로악시아를 지키기 위해,
지구인을 지키기 위해
나의 두 번째 고향 지구에서.
후보 67번 지구인 명 아케보노 료
진명 _)*$%#%@& 으로부터.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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