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닌타마/소설

[하마미키녀] 무제

 **하마미키 로미쥴리 웅앵....

**시대고증을 맞추려고 했다가 실패한 소설인데 그냥 올립니다

**퇴고없음

**메모장에서 긁어옴

**예전예전 로미쥴리 관련 썰 썼던거의 연장선

**이사, 센, 미키 여체화 주의


 
 [무제]


 
 "저쪽이다! 쫓아라!"

 턱수염이 번지르르하게 난 성난 산적 여러명이 등에 칼을 차고 시장골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산적의 시선 끝에는 이치메가사(모자에 천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시장골목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과자가게 아들이 무심코 밖을 나갔다가 빠르게 달려가는 여인을 보고 깜짝놀라 자빠지자 놀란 어머니가 아들의 엉덩이를 받쳐주었다. 아들은 눈으로 계속 여인을 좇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빨간색!"

 아이의 명랑한 옥구슬같은 목소리에 어머니는 황급히 아들의 입을 막으며 과자가게 안으로 숨기듯 들여보냈다. 여인의 뒤를 산적들이 쫓고 있었다. 산적들의 거친 발길에 골목 가게들은 서둘러 문을 닫으며 눈에 띄지 않게 아이들을 품에 안고 숨죽이며 물끄러며 바라봤다. 산적들은 여전히 여인을 찾고 있었다. 

 기어코 산적들은 여인을 찾았다. 등에 맨 칼을 꺼내 여인을 위협하자 여인은 모자를 꼭 쥐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미 뒤는 막힌 길이다. 산적들이 저마다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점점 죄어오자 여인은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보록화시(폭탄의 일종)였다. 산적들은 보록화시를 보고 화들짝 놀라 저마다 껴안으며 줄행랑을 쳤다. 손에 쥐고 있던 칼도 떨어뜨리고 도망치기 바빴다. 보록화시의 위험을 잘 알고 있는 제법 똑똑한 산적인듯하다. 여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다시 보록화시를 품안에 집어넣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군. 여인은 모자를 고쳐매고 막힌 골목길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위에서 정체불명의 남자가 떨어져내려왔다. 

 "...!"

 여인은 황급히 몸을 숨기며 품에서 손을 꺼내지 않았다. 남자는 검은 복면으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덩치는 여인보다도 훨씬 컸으며 옷의 형태로 보아 '닌자'임이 틀림없었다. 여인은 뒤로 두발자국 물러났지만 더이상 갈곳이 없어 등을 벽에 단단히 붙였다. 남자는 쿠나이를 손에 쥐고 더 가까이 다가와서 여인의 눈앞에 쿠나이를 번쩍이며 내보였다. 

 "카이케이 일족의 여자여. 닌자라면 명예롭게 죽어라."

 빛에 반사되어 쿠나이의 날이 훨씬 더 번쩍이고 있었다. 복면에 가려진 남자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자는 분명 요우구 일족의 닌자가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한 여인은 드디어 품에서 손을 빼냈으며 시퍼런 쇠붙이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둘 다 손을 휘두르면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줄 수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엿보고 있는 둘은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먼저 손을 휘두른 사람은 남자였다. 여인은 큰 눈을 부릅뜨고 몸을 크게 비틀어 간신히 피했고 남자의 쿠나이는 다른 쇠붙이하고 맞닿뜨렸다. 

 "....! 도련님. 어서 비키십쇼. 카이케이의 여자입니다."
 "내가 찾으라고 한 사람은 이자가 아니라 다른사람일텐데. 명령을 어기는 것이냐."
 
 순식간에 일어난 일. 남자의 쿠나이를 막아선 사람은 또 다른 남자였다. 밧줄이 달린 남반카기(무기의 일종)이 쿠나이에 걸려 덜덜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닌자는 고갤ㄹ 떨구며 쿠나이를 치우고, 얼굴도 보이지 않은채 사라져버렸다. 여인을 구해준 남자는 소매 안으로 무기를 집어넣고 뒤를 돌아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괜찮으신지요. 부하가 무례한 짓을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여인은 모자를 꾹 눌러쓴 채 남자의 손을 잡고 벽에서 떨어졌다. 남자의 눈에 띄지 않게 무기를 황급히 숨겼다. 부드럽게 떨어진 여인의 손가락은 남자의 손바닥을 타고 고운 모래처럼 흘러내려갔다. 여인은 비단천으로 둘러싸인 천막을 천천히 치우며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무보다 훨씬 더 연한 갈색을 띄고 있는 머리카락, 사슴보다 훨씬 크고 동그란 눈, 창백해보이지는 않지만 적당히 핏기가 없어보이는 새하얀 얼굴, 앙 다문 입술은 작고 도톰했다. 무엇보다 그 큰 눈은 아까 어린아이가 '빨간색'이라고 할정도로 홍염의 색을 타고 났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소리마저 째지는 고음이라기 보다는 어딘가 차분함이 깃든 귀염성있는 음색이었으며 단아하게 차려입은 고운 옷도 여인의 얼굴과 아주 잘 맞아떨어졌다.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은 각이 졌지만 못생긴 얼굴의 형태는 아니고 오히려 그 시대의 남자답게 생긴 잘빠진 얼굴이었다. 콧방울이 인중까지 내려와서 매부리코같은 느낌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진중한 멋이 느껴졌다. 닭벼슬처럼 온통 까치집으로 둘러싸인 머리카락은 전혀 손질이 안된 머리처럼 보이지만 느슨하게 묶은 뒷머리를 보면 아주 손질을 안하고 살지는 않아보였다. 크고 진한 눈썹 밑으로 강인해보이는 눈이 또렷하게 여인을 보고 있었다. '별말씀을요' 목소리는 여간한 청년보다는 소년의 목소리와 더 맞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윗옷과 잘 어울리는 하카마는 꽤나 귀족스러웠다. 

 "부하의 무례는 부디 용서해주십쇼."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무례를 보인 것 같아 죄송합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새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크게 웃음지었다. 

 "저는 케마 슈이치로입니다. 동쪽 카사사기(까치)고개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는 시오에 미키에몬입니다. 서쪽 카라스(까마귀)고개에서 살고 있지요."

 그것이 둘의 첫 만남이다. 



-



 요우구 일족과 카이케이 일족은 100년전부터 이어져 온 악연으로 현재 두령인 케마 토메사부로와 시오에 몬지로 역시 서로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어릴때부터 각자의 아버지에게 들어온 일족의 비극은 꽤나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카이케이의 사람이 죽으면 카이케이는 곧바로 요우구를 추궁했다. 그러나 요우구도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었다. 그럴때는 거의 절반 이상은 범인이 요우구였기 때문이다. 요우구 저택의 창고에서 큰 불이 난적이 있어서 요우구는 카이케이를 추궁했고 바로 범인이 잡혔지만 범인은 사형을 당하기 전에 자결했다. 피로 물든 두 일족간의 살벌한 경쟁은 아직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었으며 케마는 물론 시오에도 두 일족간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관여를 하지 않는게 좋다며 조약을 맺었다. 

 "요우구 일족과 카이케이 일족은 서로에게 접근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케마 토메사부로와 시오에 몬지로는 그자리에서 선언하고 조약에 혈서를 쓰고 두루마기를 두개로 나누어 각 가문에 하나씩 보관하기로 하였다. 조약의 기한은 현 두령이 죽으면 다시 갱신해야한다. 그전까지는 유효하다는 뜻이다. 부전조약이 이루어진지 10년째가 되는 해에 요우구와 카이케이는 차기 두령을 정해야하는 시기가 오게 되었다. 닌자의 삶이 길면 좋겠지만 정세가 어지러운 이시기에 길게 살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 토메사부로와 몬지로는 자식들을 앉혀놓고 후계자를 골랐다. 

 "나이상으로 본다면 키하치로가 차기 두령이 되어야겠지."
 "저는 그런 일에 성미가 맞지 않아요. 카이케이에 들어갈바에야 어머니가 계신 사쿠호우로 들어가는게 나아요."

 첫째 아들인 키하치로는 흥미 없다는듯이 되는대로 말했다. 무엇보다 키하치로는 카이케이보다는 사쿠호우에 더 잘맞았다. 자유분방하지만 예의가 있고 총명한 머리는 어머니인 센조를 많이 닮은듯보였다. 키하치로는 미키에몬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저말고 더 잘맞는 사람이 있잖아요."

 미키에몬과 키하치로는 쌍둥이 남매지만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주워왔다고해도 믿을정도다. 그러나 둘의 성격은 부모님을 똑닮았고 특히 미키에몬은 아버지인 몬지로의 말에 한번도 거역한 적이 없었다. 미키에몬은 키하치로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할거면 어서 사쿠호우에 가버리라며 짜증을 부렸지만 몬지로도 차기두령은 나이가 아직 어린 사몬보다는 나이가 어느정도 찬 미키에몬에게 주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쉽사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였다. 미키에몬에게 두령자리를 내준다는 것은 언제 미키에몬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몬지로는 좀 더 시간을 가지는게 좋겠다며 자식들을 방에서 내보냈다. 

 "아직도 고민하나요?"
 "아무래도 쉽사리 내려놓기는 쉽지 않은 법이니..."
 "그래도 저 아이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있으니 누가 뽑혀도 인정할겁니다."
 "당신은 키하치로가 두령이 되어도 상관없소?"
 "사쿠호우는 카이케이랑 궤를 달리하니까 충분히 잘해낼겁니다."

 아내인 센조는 타치바나 가문의 장녀로 사쿠호우 일족의 두령이다. 차기 두령은 키하치로로 정해진게 거의 분명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몬지로는 여전히 차기두령을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센조는 괜한 생각하지 말고 어서 결정하라고 닥달했지만 몬지로는 쉽사리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명예의 문제도 있었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이 위험한 일에 목숨을 내놓아야한다는게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도 어린나이에 두령의 자리에 올라 아랫사람을 굽어 살피는것이 힘들었는데 또다시 같은걸 반복해야한다니. 무엇보다 장녀인 미키에몬은 이제 열다섯살의 생일을 맞이했다. 

 "그러면 케마 두령에게 좌문을 구해보시는건..."
 "그럴순 없어. 서로의 두령을 알려주는 꼴이 되어버리네."
 "어차피 다음 회의에서는 차기두령을 보여야하는데 조금 이르다고 딱히 문제될건 없지 않겠습니까."
 "....."

 몬지로는 끄응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앉아 편지를 한 통 썼다. 보내는 곳은 요우구 저택이다. 

 한편 요우구 역시 카이케이와 마찬가지로 차기두령을 정해야하는 시기가 돌아왔다. 토메사부로는 자신의 방에 두 명의 아들을 불러들였다. 작은 촛불의 불씨가 세 사람의 주위에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버지의 앞에 순서대로 앉은 아들들은 저마다 경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슈이치로는 토메사부로의 첫자식은 아니지만 나이상으로는 장남이었다. 슈이치로는 10년전 카사사기 고개의 끝쪽에서 이사쿠와 마주쳤는데 지저분한 몰골에 피골이 상접될정도로 야윈 모습에 가엽게 여긴 이사쿠가 요우구 저택으로 데려온 것이다. 증조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던 슈이치로는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계속 그 무덤을 떠나지 않고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부모없는 녀석이라며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쉽상이고 돌을 맞는 일도 있었다. 카사사기 고개에서 나가라며 험한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도 증조할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몸담았던 추억이 많은 곳을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슈이치로가 토메사부로의 양자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쿠베는 슈이치로와 결투를 벌였다. 사쿠베 입장에서는 당연히 화가났을 것이다. 먼저 요우구 일족의 모든걸 책임지고 있었던 장남 사쿠베가 피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을 형으로 모셔야한다니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사쿠베는 슈이치로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닌법대결을 펼쳤다. 그러나 승패는 금방 났고 승자는 슈이치로였다. 

 사쿠베는 그 일 후로 슈이치로를 형님으로 모시고 차기두령도 슈이치로가 받는게 옳다고 생각했다. 고작해야 열네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 두령을 맡기에는 아직 모르는게 많다. 토메사부로는 앞에 앉은 두 아들들에게 먼저 질문했다. 

 "누가 더 어울릴거라고 생각하느냐."

 아버지의 덤덤한 말투에 둘은 침을 꿀꺽 삼키는등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슈이치로가 입을 떼자 사쿠베가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나이도 저보다 많고 실력도 뛰어난 슈이치로 형님이 하시는게 옳습니다."

 사쿠베의 말에 슈이치로는 당황해하며 양자인 제가 두령이 된다면 일족간의 싸움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저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며 사쿠베를 추켜세웠다. 잠자코 듣고 있던 토메사부로는 손을 바닥에 집고 엉덩이를 들어 일어났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고 뒤에 놓인 검을 꺼내들어 칼집에서 칼을 빼내어 슈이치로 앞으로 칼을 겨누었다. 

 "슈이치로. 너는 지난 십년간 나의 밑에 있으면서 무엇을 배웠지?"
 "닌법과 체술을 배웠습니다."
 "닌자로서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완벽하지는 않지만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할정도로 못한다고 생각은 안합니다."

 그순간 토메사부로는 칼날을 사쿠베쪽으로 겨누고 내리쳤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슈이치로는 눈으로 칼끝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에 미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고 칼날이 움직이는대로(정확히는 토메사부로의 근육이 움직이는대로) 움직여 잽싸게 사쿠베를 구해냈다. 사쿠베는 눈이 동그래져 슈이치로에게 안겨 뒤로 자빠졌다. 꼴사납게 넘어져 '아앗!' 따위의 말을 하고 말아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무슨...!"
 "훌륭하다. 슈이치로. 너가 요우구의 뒤를 이어라."
 "시험하신겁니까."
 "그렇다. 사쿠베는 아직 수행이 더 필요한 것 같구나."

 토메사부로는 칼을 거두고 칼집에 칼을 넣고 찰칵. 잠기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퍼졌다. 칼을 다시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토메사부로 역시 차기두령을 정하는 것은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았지만 부전조약을 위해서, 그리고 최근 정세로 보아 차기두령을 정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슈이치로에게 모든걸 맡겨버린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닌자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거쳐야 할 길이라는걸 잘 알기에 부모의 정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하였다. 

 "케마 슈이치로. 너를 요우구 일족의 차기두령으로 임명한다. 다음에 있을 카이케이와의 회의에 너도 참석해야한다. 내말이 무슨뜻인지 너라면 알고 있겠지."
 "네."

 슈이치로는 하고싶은말이 많았지만 입을 열지 않고 꾹 참아가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고있었다. 여전히 아버지는 말이 없고 오히려 슈이치로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채 둘 다 들어가보라고 했다. 

 "형님. 형님."
 "응?"
 "아까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슈이치로는 사쿠베의 정중한 감사에 손사레를 치며 별거 아니라며 사쿠베를 들어올렸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말은 한 번 들은게 아니였다. 시장을 지나가던 그 때에 만났던 여인도 같은말을 했지. 
 
 "형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빨갛습니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그,그런거 아니니까 안심해라."

 슈이치로가 사쿠베의 머리를 가볍게 만지며 쓰다듬어주었다. 어린 소년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올려주기보다는 양자지만 나이가 많은 자신이 짐을 가지고 가는게 더 옳다고 생각했다. 

 "카이케이는 용서할 수 없어요. 얼마전에 카즈마가 빗을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그것도 카이케이의 짓이 틀림없어요."
 "그건 덜렁거려서 잃어버린게 아니냐?"
 "그럴리가 없습니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어요."

 사쿠베는 주먹을 쥐며 손을 떨었다. 도저히 카이케이를 용서할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슈이치로는 카이케이를 변호하려는 입을 막았다. 여전히 사쿠베는 카즈마의 빗의 행방을 찾고 있는듯했다. 사쿠베는 방에 거의 다 다다라서 들어가보겠다며 먼저 인사를 올리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슈이치로는 혼자 덩그러니 남겨져 조용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희여멀건한 안개가 달을 숨기고 있었다. 

 "요우구의 두령인가...."

 슈이치로는 두령의 자리를 탐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어디소속인지도 모르는 작은 닌자의 후손에 불과한 자기가 어째서 요우구라는 큰 닌자유파의 두령이 되어야하는지 의문이었다. 자신도 없었다. 오히려 피가 한방울도 섞이지 않은 자신보다 친아들인 사쿠베가 대를 잇는게 맞을것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양아들인 자신을 차기두령으로 뽑았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건지 지금의 슈이치로서는 알길이 없다. 



-



 일주일 후, 요우구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카이케이와의 중요한 만담이 있기 때문에 두령인 토메사부로와 차기두령인 슈이치로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닌자복은 아니지만 속에는 늘 닌자복을 입고 있기 때문에 딱히 문제될게 없었다. 회의는 요우구 저택에서 하기로 했기 때문에 토메사부로는 시녀들에게 만찬을 준비해달라고 당부했다. 

 "천하의 요우구가 카이케이같은 놈들에게 빈약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야 없지. 상다리가 부러지다못해 바닥이 꺼질정도로 거대하게 차려라. 몬지로의 콧대를 눌러줄정도로."

 토메사부로의 말 한마디에 요우구의 사람들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을 준비했다. 슈이치로는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회의준비를 했다. 부전조약 문서도 슈이치로가 가지고 있었다. 차기두령이 정해지면 부전조약의 기한을 늘리겠다는 몬지로와 토메사부로간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카이케이의 차기두령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슈이치로는 그자가 누구든지간에 부전조약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두령님. 카이케이가 오고있다고 합니다."
 "대문을 열어라. 사쿠베!"
 "네. 아버님."
 "문지기를 맡아라. 카이케이가 아닌 놈들은 절대 들여보내지 마라."
 
 사쿠베는 무릎을 꿇고 토메사부로 앞에 자세를 잡고 잠자코 듣다가 말이 끝나자 '예'라고 말하며 몸을 감췄다. 대문앞에 선 사쿠베가 카이케이인지 아닌지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침입자를 골라냈다. 들어온 사람은 두령인 시오에 몬지로, 아내인 센조, 딸인 미키에몬과 쌍둥이 오빠인 키하치로다. 

 "먼길 오시느라 피곤하셨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쪽이야말로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이사쿠와 센조는 서로 이해하기 힘든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몬지로는 마당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토메사부로를 찾았다. 그러자 토메사부로가 동쪽 가옥 기와에서 큰소리를 내며 몬지로를 불러세웠다.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고 맞으며 서있는 모습이 듬직하고 용감해보인다. 

 "요우구에 온걸 환영한다 몬지로. 카이케이와 비교도 안될테지. 아마 넌 집에 가고 싶지 않을게다."
 "호오. 자신 있는 모양이지? 그럼 어디 잘난 그 저택을 구경해보도록할까."

 토메사부로는 기와에서 펄쩍 뛰어 마당으로 내려와 몬지로 앞에 섰다. 자신만만해보이는 표정이 말해주듯 토메사부로는 오늘을 꽤나 기대하고 있었다. 카이케이의 차기두령이 누구든지간에 슈이치로를 이길 사람은 없을거라 생각했다. 몬지로를 깜짝놀래킬정도로 강해질 자신의 아들이 자랑스럽다. 이사쿠는 토메사부로 옆에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몬지로 역시 가족들을 데리고 요우구 두명의 안내를 받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는 츠바키(동백꽃)방에서 실시할 것이다. 차기두령 연회식은 회의가 끝난후 해도 되겠지?"
 "상관없다."
 "미키에몬과 키하치로에게는 대기실을 주도록 하마. 이사쿠가 안내해줄 것이다."
 
 이사쿠는 상냥한 미소로 어린 두 닌자들을 불러세웠다. 센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몬지로의 뒤를 따라갔다. 이사쿠는 조용히 복도를 걸으며 '탄포포'(민들레)라고 써있는 방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다. 향긋한 풀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머무르면 돼. 이성이라 불편하다면 한명은 다른 방을 줄 수도 있고."
 "괜찮습니다. 이 방에서 둘이서 있어도 됩니다."

 미키에몬은 그렇게 말하며 키하치로를 힐끗 쳐다보았다. 키하치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방안으로 휙 들어가버렸다. 이사쿠는 시간이 되면 데리러 오겠다며 문을 닫고 물러갔다. 종종걸음으로 츠바키방으로 향하는 소리가 들린다. 미키에몬은 이사쿠의 발소리가 완전히 잦아들때까지 기다리다가 아무소리도 나지 않게되자 그제서야 안도하고 오비를 느슨하게 했다. 어머니인 센조가 요우구 앞에서는 숨도 아름답게 쉬어야한다며 오비를 너무 꽉 조인탓에 갈비뼈가 으스러질정도였다. 갑갑했던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숨을 몰아쉬자 키하치로 역시 하카마를 고정하는 끈을 조금 풀었다. 

 "어머니는 너무 완벽을 고집하셔."
 "조금은 참아라. 요우구니까 그러시는거겠지."

 키하치로는 불만이 많았는지 방에서 바로 뒹굴어 누워서 향긋한 풀냄새를 한가득 맡았다. 도코노마에 꽃병이 놓여있었고 그 안에는 노란색 꽃이 들어있었다. 향기는 거기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미키에몬도 키하치로가 누워있는 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았다.

 "걱정 돼?"
 "뭐가?"
 "연회식."
 "아니. 전혀. 아버지의 뜻이라면 따라야지."
 "카이케이는 역시 나랑 안맞아."
 "아버지의 아들이면서 그런말은 하지 마라."
 
 키하치로는 콧방귀를 뀌며 뒤돌아 누웠다. 태어났을때부터 같이 태어난 영혼의 반쪽이나 다름없는 쌍둥이 동생이 내심 걱정되긴 하지만, 카이케이의 말을 너무 잘듣는 미키에몬은 자유분방한 키하치로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 

 한편 츠바키방에서는 회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부전조약에 관한 내용 뿐만 아니라 혼란스러운 정세에 대한 얘기도 오고갔다. 암살의뢰가 자꾸 들어오고 있는건 둘째치더라도 이대로 노부나가의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둘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노부나가의 닌자 혐오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어서 이대로라면 요우구도 카이케이도 무사하지 못할거라는 의견이 나온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현재 잘나가는 군웅 중 한명이다. 다케다 가문이 몰락한 이시점에서 노부나가의 승기는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이부분 다시 정리하기) 몬지로는 눈썹을 찌그리며 토메사부로에게 암살의뢰에 대해 물었다. 

 "노부나가 암살을 의뢰해온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야 당연히 내가 나가야겠지."
 "요우구를 버리고 말이냐."
 "요우구의 명목으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다. 내가 없더라도 나의 후손들이 요우구를 이어나갈 것이다."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요우구를 이끌었던 것이냐!"

 몬지로는 격분하며 마시던 찻잔을 내리찍으며 토메사부로를 노려봤다. 센조는 놀라는척도 하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반대로 이사쿠는 허둥대며 몬지로와 토메사부로의 일촉즉발의 상황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토메사부로가 이사쿠에게 진정하라며 주의를 주고는 몬지로에게 더 다가갔다. 

 "안일한 생각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 하고 있는거겠지. 자식을 두 명이나 끌고 온 것이 네놈의 복잡한 심경을 나타낸다. 차기두령을 누구로 할지 아직도 못정한 것이겠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지껄이는거냐!"
 "그렇다면 왜 자식을 두 명이나 데리고 온거지? 연회식에도 참가하지 않고 가버릴 참 아니였더냐!"

 센조는 토메사부로의 일침에 살짝 동요한 몸짓을 보였다. 그리고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몬지로에게 어서 자리에 제대로 앉으라고 눈치를 줬다. 닌자라면 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서는 안되는데 몬지로는 누구보다 격분하여 센조마저 동요하게 만들었다. 센조는 사쿠호우의 두령답게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몬지로를 진정시켰다. 그제서야 몬지로가 자세를 고쳐앉아서 토메사부로에게 한가지 더 물었다. 

 "그 의뢰가 죽을게 뻔한데도 말이냐."
 "그렇다. 그렇기에 차기두령을 빨리 정한것 아니더냐. 그럼 너는 암살의뢰가 들어오면 받지 않을테냐?"
 "나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기 전에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올 것이다."
 "호오. 닌자다움이 많이 죽었구나."

 토메사부로는 호탕하게 웃으며 차를 한번에 들이키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긴긴하던 시오에 몬지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토메사부로는 탄식하는 척을 하며 몬지로를 놀렸다. 그러나 몬지로는 동요하지 않고 센조를 향해 눈짓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셨습니까?"
 "그렇다."
 "그럼 제가 말씀 올리죠. 노부나가 암살의뢰는 두쪽 모두에게 들어오지 않았으니 아직 신경쓸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시급한건 부전조약이죠. 차기두령도 정해진 마당에 부전조약에 대한 내용을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센조는 꼿꼿하게 허리를 피고 냉험한 말투로 속을 후벼파는 날카로운 말을 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끈적함이 묻어있어서 요우구의 두 명의 귀를 간지럽혀서 멍을 때리고 있었다. 그 허점을 놓치지 않고 센조는 부전조약의 조항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토메사부로는 당연히 기억한다며 손가락을 접었다 피며 조항을 읊었다. 모두 맞았다. 그러자 센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항을 바꾸는게 어떻겠냐며 제안했다. 

 "어떤 조항을 말입니까."
 "카이케이와 요우구의 사람이 절대 연관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벌써 저희만 해도 인연이 꽤 깊지요. 또한 저희의 사몬도 그쪽의 사쿠베도 어릴때는 자주 놀던 친구이지 않습니까."
 
 토메사부로는 팔짱을 끼고 센조의 말을 계속 들었다. 센조의 말에는 거짓은 전혀 없었고 빈틈도 없기 때문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옆에서 이사쿠도 센조의 말에 빠져들었다. 

 "조항을 바꾸시지요. 완전히 연관이 없을 수는 없으니 두 가문이 정을 통할 경우에만 해당하는걸로."
 "정이라면...."
 "연인사이말입니다."
 "카이케이랑 요우구가 사랑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좋습니다. 조항을 수정하죠. 지금 당장 수정할까요?"
 "아뇨. 지금 두루마기를 차기두령에게 건네준 상태라 연회식때 수정하는게 좋을듯합니다."

 센조의 의견은 손쉽게 받아들여졌고 마치 센조가 짜놓은 판의 장기말처럼 세명의 사람들은 센조가 하자는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몬지로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토메사부로도 이에 찬성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가문간의 현재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웠다. 꽤나 중요한 이야기기 때문에 몬지로도 토메사부로도 아까의 감정이 가득 들어간 소리침은 없었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냉철한 결단을 주고받았다. 그 옆에서 센조도 거들어 더 나은 방향을 제시했고 이사쿠도 끼어들어 내용을 확인했다. 


-



 미키에몬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지루하다 싶어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두령 회의는 아직 진행중이니 눈에 띄는 사람도 없을것이다. 키하치로에게 같이 나가지 않겠냐고 묻자 키하치로는 생각 없으니 혼자 갔다오라며 방을 뒹굴었다. 태평하게 늘어진 그의 모습이 내심 부러웠다. 미키에몬은 시오에 몬지로의 간택을 받은 차기두령이기 때문이었다. 

 "이사쿠씨가 나를 찾는다면 변소에 갔다고 전해줘."
 "그러지."

 미키에몬은 답답한 방을 빠져나와 탁 트인 복도와 마당으로 나왔다.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틔일 것 같다. 크고 동그란 눈에는 홍염의 색이 깃들어 있어 더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센조도 몬지로도 이런 색을 가지지 않았는데 어째서 자신만 이런 빨간색을 가지게 되었는가 고민할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신경쓰지 않게되었다. 복도를 걸을때마다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옭아매어 꽉 조이는 것이 오비의 조임과는 달랐다. 눈을 지긋이 감고 숨을 가볍게 몰아쉬었다. 동쪽에 있는 고개라 그런지 햇살의 향기가 괜스레 느껴지는듯 했다. 

 "조금 더 걷자."

 미키에몬은 좀 더 멀리 나가보기로 하였다. 게다를 타박타박 끌면서 마당으로 나와 흙알갱이를 즈려밟았다. 큰 대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밖에서 이야기하는 두 남자가 보였다. 대문에서 카이케이를 검문하던 어린 소년이 한명, 그리고 한명은 어딘가 익숙한 형체다. 

 "형님은 어서 들어가보세요.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연회식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저도 제구실은 하는 사람입니다."
 "하하. 이젠 그런말을 잘도 하는구나. 그럼 여기는 맡기고 먼저 가보마. 무슨일 있으면 서쪽 카스미(안개꽃)방으로 와라. 거기에 있을테니."
 "네!"

 사쿠베는 힘찬 말로 형인 슈이치로를 먼저 보냈다. 슈이치로는 역시 사쿠베가 걱정이 되지만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니 잘 해내줄거라고 믿고 동생과 헤어졌다. 끝까지 슈이치로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사쿠베를 향해 그렇게까지 안해도 된다며 손사레를 치며 눈을 갈매기처럼 구부리고 웃었다. 

 "응?"
 "아."

 서쪽 가옥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슈이치로는 미키에몬과 만났다. 시장골목에서 구해준 이후로 처음보는 것이다. 슈이치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미키에몬을 응시했다. 사쿠베는 카이케이를 들여보냈다고 했고 오늘은 카이케이의 사람만 왔을 것이다. 분명 그때 성이 '시오에'라고 한 것으로 보아 미키에몬은 시오에 두령의 딸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이번 차기두령 연회식에 참가하는 차기두령이란 말인가?

 "아... 이거 참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저도... 이런곳에 계실줄은..."
 "오늘은 무슨일로 오셨는지...?"

 슈이치로도 미키에몬도 서로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채 말끝을 흐렸다. 웅얼거리는 말사이에 어딘가 궁금증이 섞여있다. 슈이치로의 질문에 미키에몬은 요우구 앞에서는 숨도 아름답게 쉬어야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기억하며 꼿꼿하게 핀 허리와 당당히 핀 어깨로 카이케이의 고고함을 자아내며 말했다. 

 "아버님의 호위로 오게 되었습니다. 저도 닌자니까요."
 "아 그러시군요. 차기두령 때문은 아니구나..."

 슈이치로는 두번째 말을 굉장히 흐리면서 말했기 때문에 미키에몬에게 들리지 않았다. 미키에몬은 반대로 슈이치로에게 여기서 뭐하냐며 묻자, 슈이치로가 동생의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생은 책임감이 강한 성격이라 모든지 혼자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사족을 붙였다. 미키에몬은 자신도 비슷한 남동생이 있어서 기분을 잘 안다며 공감해주었다. 슈이치로는 미키에몬의 반응을 보자 괜스레 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회의는 끝나려면 한참 기다려야할텐데 같이 산책이라도 하는게 어떻습니까?"

 슈이치로는 자기가 내뱉고도 정말 진부한 문장이라며 헤이안시대의 사람도 구리다고 생각할 구시대적이고 재미없는 문장이라며 자책했다. 그러자 미키에몬이 소매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어댔다. 웃는 모습은 또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순진한 아이가 웃는 것처럼 순수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미키에몬은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조부가 쓰실 법한 말을 하시네요. 네. 좋아요. 안내해주시겠어요?"

 할아버지같은 말. 슈이치로는 증조할아버지랑 살았던 탓에 그 고리타분한 말투가 자기도 모르게 베어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저 여인이 좋아해준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슈이치로는 긴장된 손을 뻗으며 미키에몬에게 한마디 더 얹었다. 

 "아버지하고 헷갈릴 수 있으니까 슈이치로라고 불러주셔도 됩니다."
 "그런가요? 그럼 저도 미키에몬이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딱딱하게 굳은 슈이치로의 손을 잡은 미키에몬은 살포시 슈이치로의 옆에 서서 나란히 걸었다. 타박타박 게다 끄는 소리가 귀에 착착 감긴다. 두 사람간의 거리는 아마 3치도(약10cm) 되지 않는 가깝다. 미키에몬은 고개를 비틀어 수그린채 슈이치로를 쳐다보지 않았다. 슈이치로도 가까이 걷고는 있지만 뚫어져라 쳐다볼 수도 없는 노릇이라 괜스레 삐져나온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나란히 길을 걸었다. 자박자박 걷는 흙길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져 왔다. 요우구의 흙은 카이케이의 흙과는 다른게 확연히 느껴져서 다른나라에 와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키에몬은 숨을 가득 들이마셨다. 어머니는 요우구 앞에서는 숨고 곱게 쉬어야한다면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말하셨지만 두령도 안보고 있으니 괜찮을거라 생각하였다. 

 "연회식에 참석하시나요?"
 "그럼요."
 "그럼 오늘밤은 여기서 묵고 가시는건가요?"
 "네?"
 "아, 말이 헛나왔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슈이치로는 다급하게 말을 주워담으며 변명거리를 만들어냈지만 미키에몬은 한쪽 눈썹을 움푹 꺼뜨리고 입을 삐쭉 내밀었다. 집에는 돌아갈거라며 쏘아붙이는 말투에 슈이치로는 그런거냐며 뒷목에 삐져나온 잔머리들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연신 수그렸다. 그런 버릇이 있는 모양인지 미키에몬은 옅은 색의 부드러운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그건 버릇인가요?"
 "예,예?"
 "뒷목 잡는거요. 아까전부터 그러시길래."
 "아..."

 슈이치로는 그제서야 자기가 뒷목을 잡고 있는걸 눈치챘는지 서서히 손을 떼고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태양볕을 쬐고 있어서 그런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건지 슈이치로의 뒷목은 새빨개져있었다. 그 색깔은 미키에몬의 정열적으로 불타오르는 눈동자보다 훨씬 짙은 빨간색이었으며 쇄골 아래쪽으로도 뜨거운 무언가가 끌어올려져 벌겋게 타오르고 있었다. 

 "신경쓰였나요...?"

 슈이치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이미 두 손은 옆구리에 찰싹 붙어있다.

 "아뇨. 전혀."

 미키에몬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오히려 귀여운 버릇이라며 재잘거리며 웃었다. 웃는 얼굴이 햇살을 품은 것처럼 따스하고 민둥산처럼 매끄럽게 내려오는 눈꼬리가 살랑이며 춤췄다. 미인이라고 하기에는 어렵지만 순수함이 묻어있는 귀여운 얼굴이었다. 또다시 뒷목이 화끈거렸다. 두 입술을 포개어 꾹 다물고 말을 아꼈다. 

 "슈이치로씨는...."

 미키에몬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슈이치로를 올려다보았다. 옅은 갈색의 머리카락이 칼로 자른 것처럼 가지런히 내려와있다. 투명한 피부에서 새파란 핏줄기가 보이는듯했다. 슈이치로는 침을 꿀꺽 삼키고 미키에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요우구의 차기두령을 알고 계신가요?"
 "그건 갑자기 왜..."
 "저도 카이케이의 사람이다보니 알고 싶어져서요. 좀 무례한 질문일까요?"
 "그럴리가요. 차기두령은..."

 때마침 키하치로가 미키에몬을 부르고 있었다. 곧 이사쿠가 자기들을 데리러 오고있다는 것이었다. 미키에몬은 희미하게 들리는 키하치로의 목소리에 귀를 세워 듣더니 나중에 보자며 걸음을 재촉하며 멀어져갔다. 슈이치로는 손을 뻗어 잡으려고 해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잔상만 남은 자리에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찬바람만이 슈이치로를 감싸안았다. 

 미키에몬이 서둘러 방으로 돌아오자 키하치로와 이사쿠가 동시에 미키에몬을 쳐다봤다. 어찌나 빨리 돌아온건지 머리가 헝클어져있어서 이사쿠는 그렇게 급하게 오지 않아도 기다릴 수 있다며 옅은 미소를 흘렸다. 요우구의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받는건 사양인지라 미키에몬은 좀 더 딱딱한 표정을 유지한채 오비를 단단히 조였다. 키하치로는 화려한 외모에 어울리는 눈을 아래로 내리며 이사쿠의 뒤를 쫓아 걸었다. 미키에몬도 키하치로와 나란히 서서 걸었다. 

 길고 긴 복도를 걸으면서 미키에몬은 생각했다. 찰나의 만남이었지만 많은걸 알 수 있었다. '케마'라는 성을 들었을때 저 자가 유명한 케마 두령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차기두령을 무조건 큰아들로만 해야하는 법은 없으니 아닐 수도 있을테지. 그렇지만 이쪽은 차기두령이란 말이다. 미키에몬은 말하고 싶은게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말하지 못하고 이사쿠의 부름을 받아 츠바키방으로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사쿠는 츠바키방을 지나치고 다른곳을 향해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미키에몬은 왜 츠바키방을 지나치냐며 이사쿠를 멈춰세웠다. 

 "연회식은 다른 곳에서 하니까요."
 "회의는 완전히 끝난건가요?"
 "네네. 이제는 차기두령 연회식만 남았으니 자시가 되기 전까지는 돌아갈 수 있을겁니다."

 후후. 이사쿠는 여우처럼 사람을 홀리는듯한 매혹적인 목소리로 어린 두 소년소녀를 매료시켰다. 츠바키방을 지나 아주 큰 방이 나왔다.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소음이 문밖으로 새어나왔다. 아주 어린아이의 장난기가득한 소리로 보아 사몬이나 사쿠베는 아닌듯했다. 드르륵 문이 열리고 아래를 쳐다보니 조카들의 재롱에 연신 박수를 치는 토메사부로와 깔깔 웃는 몬지로와 센조가 보였다. 앙증맞은 엉덩이를 쭉 내밀고 민달팽이 공연을 보여주는 세 명의 작은 아이들은 토메사부로의 순진한 조카들이다. 

 "오, 드디어 왔군."

 토메사부로는 이사쿠와 아이들을 보고 박수를 멈추고 옆에 있는 요리사에게 음식을 더 가져오라며 부탁하고는 조카들을 내보냈다. 상당한 개구쟁이인지 아이들은 희희덕거리며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연회장을 뛰쳐나갔다. 와아- 하는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아직 열살밖에 안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들이다. 

 "그럼 모두 모였으니 시작을 해야겠지."
 "요우구의 차기두령은 어디있지."
 "성질도 급하긴."

 토메사부로는 턱을 들어올려 부하들에게 차기두령을 데려오라는 눈짓을 했다. 토메사부로 뒤에 대기를 하고 있던 부하 두명이 위로 튀어올라 천장을 뚫고 닌자걸음으로 발자취를 감췄다. 몬지로는 언짢은 표정으로 토메사부로를 노려봤다. 그러자 토메사부로는 걱정 안해도 곧 온다며 술잔이나 받아들지 않겠냐고 태평한 말을 늘어놓았다. 참을 수 없이 화가난 카이케이의 두령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가만히 보고만 있던 센조가 먼저 짜증내는 투로 쏘아붙였다.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하세요. 요우구 저택이라고 해서 남편을 놀리고 싶은 생각이 많으실텐데 저도 있다는걸 엄두해 주셔야죠."
 "이거 참 실례가 많았수다."

 토메사부로는 심심잖은 사과를 하며 뒷목을 잡았다. 삐져나온 잔머리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왔다. 

 "허나, 그쪽의 차기두령은 누굽니까. 두 명을 데리고 왔건만 도저히 예측을 할 수 없군."
 "그건 요우구쪽의 차기두령을 보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센조는 그렇게 말하고 서서히 입을 찻잔으로 가져다대며 차를 마셨다. 아무일도 없다는듯이 입을 싹 닫는 모습이 그야말로 요물같았다. 몬지로는 자신의 아내지만 무서운 여자라며 중얼거리자 센조가 '어머 이렇게 무서운 여자와 결혼한 사람은 당신이 아닙니까'라며 몬지로를 놀리는 투로 말했다. 
 
 "두령님. 왔습니다."
 "그래. 들어와라."

 서서히 열리는 문 사이로 적색의 머리를 가진 소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까 나간 부하의 허리춤에 가까스로 오는 정도인 아직 어린티가 제법 나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눈매는 또렷하고 굳게 다문 입은 훗날 토메사부로를 꼭 닮을 사람이라는걸 확인할 수 있었다. 미키에몬은 소년의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고작해야 자신의 남동생이랑 비슷한 나이대의 사내라면 더 볼 것도 없이 카이케이의 두령쪽이 우수하다. 

 "왜 네가..."

 그러나 토메사부로는 머리에 물음표를 띄우고 왜 다른 녀석이 왔냐며 부하에게 추궁하듯 물었다. 그러자 적발의 소년이 또박또박 큰소리로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을 토해냈다. 아마 모두 앞에 있어서 긴장한 탓이다. 약간의 쇳소리가 담겨있었지만 그 쇳소리의 긴장감마저도 애교로 봐줄 수 있을정도로 어린 소년이었다. 

 "형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카스미방에 가보았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찾지 못하고 네가 온 것이냐?"
 "네."

 카이케이 쪽의 사람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한다. 차기두령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니 이게 무슨 창피란 말인가! 토메사부로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사쿠베가 있는 쪽으로 다가가 문틀을 잡았다. 부하는 어딜가도 도련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땀을 뻘뻘흘리며 핑계를 댔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연회장은 2층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닌자를 보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음식을 나르던 요리사들과 부하들은 깜짝 놀라 음식을 떨어뜨렸고 연회장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평범하게 들어올 수는 없는거냐며 토메사부로가 아들을 꾸짖었다. 카이케이의 사람들은 뒷걸음질을 치며 주춤했지만 단 한사람, 미키에몬만은 그자의 얼굴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석탄같은 새까만 머리, 다부진 어깨와 폼은 토메사부로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자는 케마 토메사부로는 커녕 이사쿠의 피도 섞이지 않은 전혀 모르는 사람의 자식. 

 "꽤나 대범한 등장이군."
 "신고식은 화려하게 치뤘네요."
 
 몬지로와 센조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최대한 칭찬을 하며 무마시키려고 하였다. 부모의 모습을 보고 키하치로도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어댔다. 그러나 미키에몬만은 웃지 않았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바보같은 모습을 보여주던 사내가 요우구의 차기두령이라니. 아까 만났을 때 말하지 않은 것도 너무 괘씸해서 화가날 정도다. 사내가 몸을 굽혀 창문을 통해 성큼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여주며 토메사부로 앞에 서서 희망을 안은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앞으로는 제때제때 다녀라. 괜히 동생들이 힘들어진다."
 "예. 죄송합니다."

 토메사부로는 다시 문에서 멀어져 카이케이 쪽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소개하지. 이쪽이 요우구의 차기두령. 케마 슈이치로다."

 토메사부로의 말을 맞받아치듯 몬지로도 옷무새를 간단히 정리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그럼 우리도 소개하지. 이쪽은 카이케이의 차기두령. 시오에 미키에몬이다."

 슈이치로와 미키에몬은 동시에 눈이 맞아 떨어졌다. 아까의 봄바람같은 부드러움은 어디로 가고 두 사람의 눈동자에는 일족의 안위를 책임지는 두령의 영혼만이 사려있었다. 모두가 미키에몬의 눈을 사과, 석류같은 빨간 과육에 비유했지만 몬지로는 딸의 눈이 '모든것을 태워버릴 홍염의 색' 이라고 표현했다. 미키에몬은 그 표현을 마음에 들어했으므로 늘 자신을 그렇게 지칭했다. 슈이치로의 눈은 그에비해 연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모두가 슈이치로의 눈을 자수정에 비유했지만 토메사부로는 아들의 눈이 '새벽의 안개를 머금은 몽환의 색' 이라고 표현했다. 슈이치로는 아버지의 표현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닌자라면 가져야할 덕목을 말해주는 문구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두루마기를 꺼내라. 차기두령의 혈서를 작성해야한다."

 몬지로와 토메사부로는 동시에 같은 말을 했다. 슈이치로는 품 안에서 두루마기를 꺼냈고 미키에몬도 소매 속에서 두루마기를 꺼냈다. 토메사부로 뒤에 있던 부하들이 재빠르게 달려나와 두 명의 차기두령에게 붓을 건네주었다. 붓을 받은 두 사람은 아무말 하지 않고 조용히 두루마기를 펼쳐 빈 공간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요우구 16대 두령. 케마 슈이치로 (用具 十六代目 お頭。食満 守一郎)
  카이케이 16대 두령. 시오에 미키에몬 (会計 十六代目 お頭。潮江 三木ヱ門)

 부드럽게 꺾인 두사람의 붓이 같은 소리를 내며 쓰던 손을 내려놓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홍염의 색과 몽환의 색이 어우러져 뒤섞인 혼란의 색을 만들어냈다. 둘의 간극에는 숨쉬기 조차 어려운 긴장감이 팽팽 돌고 있었다. 뒤이어 아버지들이 혈서를 쓰라며 같은 말투로 말했다. 슈이치로는 엄지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이름을 휘갈기며 썼다. 미키에몬 역시 검지손가락을 깨물어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하고 둘은 두루마기를 들고 조항을 복창하려 했다. 그러자 센조가 헛기침을 했다. 몬지로와 토메사부로는 아직 읽지 말라며 조항을 수정해야한다고 둘을 말렸다. 

 "회의로 정한 내용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전조약에 어패가 있는 모양이라서."
 "조항의 세번째 문단을 봐라. '카이케이와 요우구의 사람들은 연관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쓰여있을 것이다."

 슈이치로와 미키에몬은 두루마기를 펼쳐 부전조약의 조항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발견한 슈이치로가 "아 있어요"라며 소리내서 외쳤다. 그러자 토메사부로가 조용히 하라며 주의를 주었다. 

 "그 조항을 수정한다. 카이케이와 요우구 사이에 연관이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그 조항을 '연정의 관계에 있을때 해당한다'고 바꿔라."

 "네?" 미키에몬과 슈이치로는 동시에 각자의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연정의 관계에 놓인다면 추방으로 끝나지 않는다며 각오를 단단히 해야한다는 묵직한 아버지들의 말에 슈이치로는 식은땀을 흘렸고 미키에몬은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몬지로가 어서 작성하지 않고 뭐하냐고 말을 툭 던지자 미키에몬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조항을 바꿨다. 슈이치로 역시 눈치를 보다가 마찬가지로 조항을 바꿨다. 마지막으로 붓을 다 쓰자 붓을 부하들에게 넘겨주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토메사부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두루마기를 받아들었다. 이 두루마기는 차기두령인 네가 정말 16대 두령이 되었을때 돌려주겠다며 품속에 찔러넣었다. 몬지로 역시 미키에몬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두루마기를 빼앗듯이 받아들고 소매 안 깊숙히 넣었다. 

 "어때 만찬은 즐거우셨나?"
 "요리사들만 힘들었겠지. 네놈의 성질머리를 다 받아줘야하니까."
 "솔직하지 못한게 너답군."

 만찬을 다 즐긴 후 몬지로네 가족을 배웅해주었다. 미키에몬은 여전히 오비를 꽉 조이고 숨을 참고 있었다. 요우구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니 숨이 아름답게 쉬어지지 않아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센조는 꼿꼿하게 서서 몬지로의 옆에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인형처럼 서있었다. 토메사부로와 몬지로는 두령이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얼굴에는 소년미가 가득했다. 그리운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나는 것 같아 둘은 시간가는줄 모르고 이야기 했다. 

 "저...어머니..."
 "왜 그러지?"
 "그게... 언제 가나 해서요..."
 "조금만 참아라. 너희 아버지는 여기만 오면 몇십각이고 떠들어댄다니까."

 센조는 한숨을 짓고 미키에몬을 다독였다. 미키에몬은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여 물러가서 저 끝으로 가서 섰다. 여전히 몬지로와 토메사부로의 수다가 끊이질 않고 더불어 이사쿠와 센조도 고도의 농담을 주고받았다. 미키에몬은 끝으로가서 모두가 안보는 곳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닌자복을 입고 임무하는 시간이 더 좋을 것 같았다. 미키에몬은 눈앞이 핑 돌았다. 하늘이 파란색이 아니라 보랏빛으로 보였다. 아니, 보랏빛으로 보인것은 하늘을 잘못 본게 아니였다. 새벽의 안개를 머금은 몽환의 색이 눈앞에 있었다. 

 "괜찮으세요?"
 "아..."

 미키에몬은 수치스러워서 자결하고 싶을지경이다. 요우구 앞에서는 숨도 아름답게 쉬라고 했거늘, 그런 요우구 앞에서 못볼꼴을 보이고 말았다. 차기두령인 케마 슈이치로의 품에 안겨 숨을 헐떡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센조도 몬지로도 미키에몬의 꼴사나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고 수다 떨기에 바빴다. 심지어 꽤나 멀리 떨어져있어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에 슈이치로는 미키에몬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고 간신히 자기 품에서 숨을 색색 쉬고있는 홍염의 색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힘들어보이는데...'

 슈이치로는 고민하다가 미키에몬의 허리춤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대었다. 그러자 미키에몬이 깜짝놀라 소매 속에서 쿠나이를 꺼내들고 슈이치로의 목근처에 가져다대었다. 하마터면 찔릴 뻔한 슈이치로가 목을 뒤로 쭉 빼고 미키에몬에게서 손을 서서히 놨다. 그래도 미키에몬은 비틀거리며 다시 앞으로 쓰러져 슈이치로에게 기댈 뿐이었다. 슈이치로는 아버지들의 이야기도 길어질듯하니 눈치를 살피다가 허리를 수그리며 미키에몬의 귓가에 속삭였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탓인지 미키에몬은 흠칫 놀라며 척추에서 전율 올라왔다. 

 "걱정마세요. 아버지는 이쪽을 보고 계시지 않아요. 너무 힘들어보이는데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게 있을까요?"

 미키에몬은 쿠나이를 계속 목에 가져다댄채로 숨을 몰아쉬며 입을 닫은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슈이치로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미키에몬에게 사과를 하고는 다시 허리춤에 손을 갖다대었다. 

 "....!"
 "조금만 참으세요. 정말로 힘들어 보여서 그래요. 전 여동생은 없지만 어머니 옷을 자주 만진 적이 있어서 이정도 옷감은 알고 있어요. 여기를 좀 느슨하게 하면..."

 슈이치로는 오비와 기모노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살짝 풀었다. 빈틈이 생긴 오비와 기모노 사이에 바람이 솔솔 통했다. 미키에몬은 아까전보다 훨씬 더 편해진 얼굴로 숨을 크게 쉬었다. 하늘이 다시 파랗게 보였다. 두 눈을 깜빡이며 서둘러 슈이치로의 품을 벗어났다. 그러자 슈이치로가 뒷목을 잡고 삐져나온 잔머리를 괜스레 만지작거렸다. 

 "제대로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무례를 저질러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차기두령이 될텐데 제가 그만 실례를..."
 "아,아닙니다. 덕분에 확실히 편해졌어요.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짓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네에...."

 슈이치로는 고개를 수그리며 동굴속으로 들어가는듯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그러나 미키에몬은 타박타박 걸어와서 쿠나이를 평평하게 하여 슈이치로의 턱을 들어올렸다. 꼼짝할수도 없이 당해버린 마당에 슈이치로는 조용히 미키에몬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제 몸을 만진 대가는 이걸로 충분할까요?"
 "하,하하... 대범하시네요."
 "여기서 죽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죠."
 "확실히..."

 확실히 아름답습니다. 슈이치로는 이 말이 혀에서 맴돌고 있었지만 간신히 이성의 줄을 잡고 말을 토해내지 않았다. 익살스럽게 웃는 슈이치로의 얼굴을 보자 더 화가 치밀어 오른 미키에몬은 쿠나이의 날을 보이며 그를 위협했다. 

 "다음에 만날때는 차기두령으로 만나게 되겠군요."
 "그,그렇죠..."
 "조항을 봤으니 아시겠지만 저희는 더이상 가까워지지 않는 편이 좋아요."
 "그런가요."

 미키에몬은 쿠나이를 내빼서 소매 속에 찔러넣었다. 슈이치로는 여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뒷목을 잡고 으음. 소리를 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약간의 침묵이 흘러서 두 사람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가만히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을 발로 찰 뿐이었다. '연정을 가지면 추방당한다.' 이 조항의 문제도 있지만 하필이면 다음 두령으로 뽑힌 신세대의 청년들에게 닥친 시련이라니. 드디어 몬지로와 토메사부로가 수다를 멈추고 정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미키에몬을 부르는 센조의 다급한 목소리에 미키에몬은 슈이치로를 지나쳐서 뛰어갔다. 아까전보다 훨씬 편한 모습이었다. 슈이치로는 다음에 만날때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나자며 말을 덧붙였지만 미키에몬은 뒤돌아 살짝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까요?"
 "각자 가문이 망하지 않는 이상 질리도록 만나게 될 것 같은데요."

 멀어져가는 미키에몬을 손으로 잡아보려고 하지만 이미 떠나간 공허의 안개가 반겨줄 뿐이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허리를 감싸안았던 그 감촉을 더듬어보았다. 옷감때문에 제대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자신과는 다른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의 육체였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온몸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모든걸 불태우는 홍염의 색은 실존하는 것이었나. 슈이치로는 헛웃음을 치며 다시 슬그머니 뒷목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하,하하... 아버지한테 혼나겠군."

 새벽의 안개를 머금은 몽환의 색이 저물어 가는 석양의 주황빛을 머금어 더 촉촉하니 빛이 났다. 다음에 만날때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고민하다 헤이안 시대에도 안쓰던 그런 구닥다리 내용이 생각나버려서 슈이치로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수그렸다. 숨을 길게 내뱉는다. 하늘이 더할나위없이 파랗다. 그리고 석양은 빨갛게 피어올라서 자꾸만 순진한 소녀의 미소를 담은 카이케이 차기두령이 떠올라버린다. 진정하라는 뒷목의 색깔은 이미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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