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렌 생일 축전으로 쓴 글
*좀 날림(....)
*나유타 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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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호시 렌 생일 축전
<선물>
3월 31일. 일본에서는 1년의 마지막날이다. 물론 통상적으로는 12월 31일이 1년의 마지막이지만 새 학기 등의 이유로 일본의 1년의 마지막 날은 3월 31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날은 아무런 날도 아니다. 적어도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는.
쟈이로악시아의 신곡을 만들기 위해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기를 반복하고 있었을 때 눈앞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 스스로도 몸이 안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위 사람들의 성가신 배려 때문에 내 몸을 조금은 돌볼 줄 알게 되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좋은 곡이 나오기도 어렵다. 그 정도는 상식 중의 상식이다. 그런 상식도 모르는 보컬도 있는 것 같지만.
"칫. 바람 좀 쐬고 와야겠어."
방안에서 세차게 적어 내려 간 가사가 노트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것조차 신경 쓰지 못했다. 나중에 내가 알아볼 수만 있으면 상관없다. 아버지를 뛰어넘기 위한 밴드. 아버지를 이기기 위한 밴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 이상의 것이 되어버렸다. 이번 곡은 아버지의 영향이라든가 상관없이 잘 만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컨디션 조절은 필수였다. 내 방에는 가구라고는 고작해야 책상과 침대가 전부여서 반경이 거기서 거기였다. 방 안에서 한숨 돌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문을 열자 내 눈앞에 보인건 성가신 잔소리꾼인 사토즈카다.
"나유타, 어디 나가려고?"
"너랑 상관없는 일이다."
"비가 온다니까 되도록이면 빨리 돌아.... 아, 벌써 나가버렸네."
주변인들이 뭐라 하는 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성가신 녀석들 천지다. 바람이 세니까 옷을 좀 더 두껍게 입고 가는 게 어떠냐는 사카이가와의 말도 무시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사러 가는 정도뿐인데 뭐가 그리도 호들갑인 거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수록 귀가 먹먹해진다. 숨을 크게 내리 쉬어본다. 밀폐된 공간에서 숨을 들이마셔봤자 같은 공기를 마시는 거에 불과했다. 소용없는 짓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런 쓸모없는 짓을 할 정도로 나는 한가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곧바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맹한 얼굴을 하고 있는 편의점 알바를 째려보았다. 여전히 맹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마음에 안 들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아르고나비스라고 써져 있는 클립이 있었다. 내가 그걸 유심히 보고 있자 그 맹한 알바는 갑자기 눈이 반짝 빛나더니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슬슬 그 바보 같은 대화에 질리려고 할 때 즈음에 한번 더 째려보자 다시 '히익' 소리를 내며 안경을 고쳐 쓰고 잔돈을 내어주었다. 짜증 나는 녀석들 천지다.
"후우.... 조금 걸을까."
시원한 바람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신선한 공기가 내 몸을 돌면서 순환되고 있었다. 폐 안으로 들어오는 깨끗한 산소가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눈을 감고 1분 정도 그 공기를 만끽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새파란 공기의 맛이 났다. 이대로 돌아가면 신곡을 금방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굳이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보들과 같이 다니다 보니 바보짓이 늘은 걸지도 모른다.
투둑-
시원한 공기의 맛은 금방 차가운 먼지의 맛으로 바뀌었다.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방울은 순식간에 빗줄기로 변했다. 캔커피를 담은 봉지가 점점 젖어들어갔다. 눅눅한 공기는 점차 먼지의 맛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회색의 하늘은 먹구름을 불렀고 그 구름 속에서 쏟아지는 비의 행방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시켰다. 우산이 없어서 대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시끌벅적했다. 귀가 아파진다. 빗소리에 섞인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짜증 나니까 저리 꺼져.
"나유타군....?"
빗소리에 막혀 들리지 않았던 차분한 말소리가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빗줄기를 맞아가며 자신의 비참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파란색의 보석이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하늘색 우산을 쓰고 있는 나나호시는 시선의 끝에 서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나 그랬다. 시선 끝에는 네가 있었고 그 시선을 바라보고 있으면 라이벌, 쓰러뜨리고 싶은 존재, 투지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 그런 단어만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강한 불꽃의 씨앗이 심장에서 피어나 나를 괴롭힌다. 열창을 하며 모든 체력을 소진해 보아도 조금의 쉼이 있으면 머릿속으로 너를 떠올리고 마는 것이다.
"비가 많이 와. 그러다 감기 걸려. 같이 쓰자."
역시 편의점에서 나와서 바로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다. 아르고나보다는 쟈이로가 가까울 터이니 지금이라도 못 들은 걸로 하고 무시하고 뛰어가면 나나호시는 잡지 않을 것이다. 그럴 용기도 없을 테니까. 오늘이 무슨 날인지 나도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래서 이렇게 재회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그러나 거리 끝에서 우산을 쭉 내밀며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미소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지고 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들어 이리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 손짓에 환하게 웃던 미소가 얼굴에 크게 번지며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단걸음에 뛰어와 우산을 내밀었다.
"자! 우산!"
녀석의 밝은 에너지에는 감당할 수가 없다. 그것이 싫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나호시 가까이에 있으면 나까지도 심장의 고동수가 증가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했다. 목부근에서부터 열기가 느껴졌다. 바로 얼굴에 드러나진 않았지만 온몸이 뜨거워지고 만다.
"어이, 제대로 들어. 반반씩 들 거잖아."
"하지만 나유타군이 훨씬 많이 맞았잖아. 조금이라도 더 썼으면 좋겠어서...."
"쓸데없는 참견이다."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나호시의 얼굴을 보니 나조차도 저절로 아까 봤던 맹한 알바의 얼굴이 되어버린다. 입을 동글게 말아서 웅얼거리는 목소리, 잔뜩 내려간 눈썹, 내리깐 속눈썹...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얼굴을 잘도 하고 있었다. 그때 봤던 알바가 왜 맹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전에 어이없는 광경을 봐서 그런 것이다. 내가 나나호시에게서 우산을 낚아채듯 가져가버리자 눈이 동그래져서는 더 놀란 얼굴을 하고 양쪽 검지 손가락을 서로 부딪히며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잡아먹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뭐야.
"있잖아, 시간 되면 우리 셰어하우스에 올래?"
"하?"
"....에헤헤."
코앞이 쟈이로의 셰어하우스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해버리는 배짱이 두둑하다고 해야 하나 맹하다고 해야 하나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다. 이유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래주면 안 되냐며 더 밀착해서 올려다보는 그 동그란 눈동자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게 찬성의 의미인 것도 알고 있었던 건지 나나호시는 잘됐다며 다시 해맑게 웃었다.
"사실 오늘 내 생일인데 애들이 모두 밖에 나갔어. 알바랑 약속이랑 이러저러한 이유로. 그래서 혼자 있다 보니 조금 쓸쓸해져서 나유타군을 보러 쟈이로 셰어하우스까지 걸어왔는데 딱 너와 마주친 거야. 신기하지?"
그래서 만나기 싫었던 거다. 선물은 집에 있는데 이 상태로 아르고나까지 같이 걸어가면 나중에 발뺌도 못한다. 지금 내 손에 들린 거라곤 아까 편의점에서 산 블랙 캔커피 한 캔뿐이다. 그렇다고 집에 갔다가 다시 나오겠다고 하는 것도 웃긴 상황이다. 이럴 때만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 건 네가 옆에서 그런 것이다.
"다들 바쁘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아르고나비스도 점점 인기도 올라가니까 더 바빠질 거야."
"너, 정말로 그 녀석들이 네 생일을 잊었다고 생각하는 거냐?"
"응?"
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이 정도는 눈치껏 알아차려라.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내가 참견쟁이었던가. 그건 아닐 것이다. 아르고나비스의 일은 아르고나비스가 해야 할 일. 내가 참견하니 많이 할 것도 아니다. 저 순수한 눈동자를 바라보면 평상시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이 입 밖으로 나와버린다. 잡생각을 지우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자 나나호시가 나에게 더 밀착했다. 비에 젖은 축축한 공기의 냄새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네온으로 가득 찬 거리인데도 눈의 피로도가 덜했다. 다가오는 큰 눈동자가 나를 쭉 쳐다봤다. 그 자주색 빛깔의 눈동자 속에는 내가 들어있었지만, 그 눈동자를 지나쳐 시선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면 그렁그렁 맺힌 그 눈물이 다시 눈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같이 가줄 거야?"
"앞장서."
네가 말하지 않았으면 가지도 않았겠지. 나나호시와 함께 있으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조차도.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새 녀석과 동행하고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다. 우연히 만나 우연히 거리를 걷고 우연히 들른 아르고나의 셰어하우스에서 우연히 생일 파티를 하겠지. 앞장서서 걷는 나나호시의 뒤통수를 바라보고 있으면 대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우산 안에는 나와 나나호시 둘만이 서있었고 그 공간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 서로의 보폭에 맞춰서 조심히 걷고 있었다. 물웅덩이를 찰박거리며 밟아도 상관없었다. '이 모퉁이를 돌면 돼', '집에 먹을 게 있을지 모르겠다' 잔뜩 들뜬 나나호시의 목소리가 귀에 기분 좋게 걸렸다. 역시 이 녀석이랑 있으면 울렁거린다.
"잠깐만 기다려줘. 열쇠를 찾아야 해서."
"빨리 해라."
집 앞에 다 도착하고 나서야 어깨에 맨 에코백에서 열쇠를 찾아 허둥대는 게 보였다. 아마 문은 열려있겠지. 열쇠를 쓰지 않아도 다른 녀석들이 나나호시의 생일을 축하겠다며 현관문 앞에서 폭죽을 퍼뜨릴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어이, 문 열려있다. 그냥 들어가지."
"어? 정말이네. 내가 나갈 때 문을 제대로 안 닫고 나갔나 봐."
문고리를 잡아당기고 먼저 들어가라고 문을 살짝 열어 나나호시를 들여보냈다. 폭죽을 가장 먼저 맞는 건 너여야 하니까.
퍼엉-
예상대로였다. 어떻게 단 한 번을 예상을 벗어난 적이 없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매번 같은 레퍼토리에 전혀 눈치를 못 채는 둔한 나나호시도 문제지만 가장 문제는 고료가 생각한 서프라이즈 파티겠지. 단숨에 네 개의 폭죽이 터지면서 큰소리가 났다. 아까의 나나호시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귀에서 나가고 시끄러운 폭죽의 소리만이 남아서 쨍하게 울렸다.
"렌~! 생일 축하해~!!"
활기찬 소리들이었다. 태양과도 같은 따스하면서 활기를 띄우는 밝은 에너지의 소리들. 나하고는 전혀 맞지 않는 것들. 먼저 들어간 나나호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런 걸 어떻게 준비했냐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타이밍이다.
"너희들..... 흐윽..."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한걸 여태껏 본 적 있었던가. 이번에도 예상대로 '다들 생일을 축하해 줘서 고마워' 따위의 말을 하며 현관문 앞에서 울먹이고 있는 걸 나나호시의 '친구들'이 그를 달래주며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생일 모자를 쓰자며 울고 있는 녀석의 머리에 올린 모자를 보고 있으니 실소가 나왔다. 어린애도 아니고 아직도 그런 유치한 걸 하다니. 다른 녀석들은 더 가관이었다. 고료는 피에로 가면을 썼고 마토바는 케이크가 그려진 선글라스를 썼다.(어제 사토즈카도 같은 걸 쓰고 있었는데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시로이시는 입으로 소리 내는 장난감을 가지고 있었고 키쿄도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다. 우스꽝스럽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잘도 그런 어설픈 서프라이즈 공격에 속아 넘어가는 나나호시가 되려 대단해 보였다.
"너희들 다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에이~ 당연히 파티하려고 꾸며낸 작전이지!"
"자자, 생일의 주인공은 촛불을 부세요~"
"음식도 전부 준비했어. 어서 들어가서 먹자."
"그런데 아사히는 왜 데리고 온 거야?"
키쿄의 말에 일동 전부 뒤돌아서 나를 쳐다봤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레퍼토리라며 서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현관문을 다시 열었다. 불청객은 이만 빠져주겠어.
"쓸데없긴."
"자,잠깐만! 이왕 이렇게 온 거 같이 파티 즐기다 가. 케이크도 같이 먹자."
"네 생일은 네가 알아서 챙겨. 나하고 관련 없다."
"그러지 말고~ 같이 지내면 재밌을 거야. 응?"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나의 팔을 잡고 다시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덜커덩, 문이 다시 닫혔고 생긋생긋 웃고 있는 다섯 명의 유치한 녀석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나유타도 같이 놀다가 가' 고료의 씩씩한 말투는 언제 들어도 귀가 아프다. 싫다면 지금 나가면 되지만 역시나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양쪽 손으로 나의 팔을 지긋이 잡던 나나호시가 어서 들어오라며 생긋 웃었다. 가슴에 바늘을 수놓은 느낌이다. 아주 아프진 않지만 그렇다고 안 아픈 것도 아닌,
"간지러."
"응?"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 되면 나갈 거야."
"응!"
'너도 모자 쓸래?' 고료의 이상한 말에 나는 그런 유치한 짓거리 절대 안 하겠다며 자리를 피했지만 결국 다른 녀석에게 씌워졌다. 벗고 싶었지만 쓰고 나니 나나호시의 눈이 더 반짝거렸다. '나랑 똑같은 거네!' 같은 말을 해서 더 벗기가 난감해졌다. 어쨌든 빨리 파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제야 깨달았지만 나는 집에 돌아가서 어서 신곡의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한다. 나나호시를 만나면서 다 까먹어버렸지만 어떤 느낌으로 작업을 할지 다 생각해 놨다. 그리 시간이 많이 없다고 말을 꺼냈지만 그때마다 작은 해프닝이 있어서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그보다 케이크는 왜 자기네들이 직접 만든 거야. 사 오는 게 더 빠르잖아.
"반리네 목장 우유로 만들고 리오가 카레의 향기를 조금 더하고 와타루가 데코한 아르고나비스 특제 케이크 대령이요~"
"우와! 고마워 얘들아. 정말 맛있겠다."
"결국 유우토군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재료는 다 내가 사가지고 왔잖아...!"
사토즈카의 동생은 단 걸 좋아한다고 했던가. 언젠가 사 토즈카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꽤나 성가신 녀석 같던데 용케도 그런 케이크를 만들었군. 지금은 단 것도 먹고 싶지 않고 매운 것도 먹고 싶지 않아서 당장 여기서 나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나나호시 옆자리에 앉혀져서 참고 견디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케이크 한 입만 먹고 나가겠어.
"으음.... 마....맛있어...!"
"거짓말도 못하는 녀석 같으니. 이리 내."
생일의 주인공이 먼저 먹어야 한다며 시끄럽게 해대던 녀석들 때문에 먼저 맛보더니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천성이 착한 녀석이라 쓴소리도 못하고 눈을 억지로 웃으며 입꼬리를 떨었다. 더 먹였다간 배탈 날 것 같아 빼앗듯 케이크 접시를 채가서 한입 먹어보았다.
"......제정신이냐?"
끔찍한 맛이다. 달기만 하다면 차라리 낫지. 이게 무슨 맛인지도 설명하기 힘들다. 고료의 머리통을 때리고 싶어지는 맛이다. 매서운 눈빛으로 나나호시를 제외한 전원을 째려보니 다들 움찔하며 저마다 앞에 놓인 케이크 접시를 하나씩 들어 한입씩 맛보기 시작했다. 어떤 녀석은 구역질까지 했다. 생일이라고 어쩌고 하더니 기껏 가지고 온 게 이딴 케이크라니.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녀석들이다.
"지,지금이라도 케이크 주문할까....?"
"찬성...."
생일의 주인공이 눈치를 살피다가 핸드폰을 들고 제과점에 전화를 걸려는 순간까지 가서야 자신들이 얼마나 끔찍한 물건을 만들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수그리고 당장 그러라고 오히려 등을 떠밀어주었다. 케이크가 올 때까지 생일선물 주는 시간을 가지겠다며 고료가 센터에서 서서 말하자 나나호시는 박수까지 치며 눈을 반짝였다. 선물 이야기에 나도 덩달아 움찔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거라곤 아까 편의점에서 산 캔커피 정도뿐이다. 그것도 빗물이 봉지에 들이차서 물과 함께 고여있었다.
"그럼 일단 나부터-"
"어이. 나나호시."
보잘것없는 선물. 어차피 이 녀석이라면 좋아할게 분명하다. 별로 지금 주고 싶진 않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서 집으로 돌아가 진짜 선물을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일단 임시방편으로 나는 빗물이 고인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아까까지의 아르고나의 한심함이 나한테 전이된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지만 어찌 되든 상관없다. 이 자리를 나갈 수만 있다면 나중에 더 큰 선물을 준다는 약속과 함께 주기만 하면 된다.
"받아라."
"에? 나 주는 거야?"
"착각하지 마라. 생일선물 같은 건 아니니까."
"아, 응."
정말 생일선물이 아니니까. 애초에 생일선물로 이딴 싸구려 캔커피를 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하지만 이런 깊은 생각도 모르고 고료는 시끄럽게 짖어댔다. 분명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걸 왜 나나호시에게 선물로 주냐는 핀잔일 게 틀림없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놈.
"나유타! 아무리 너라도 이건 아니지! 생일이잖아. 제대로 준비해서 전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전달되지 않아."
"아, 유우토. 난 괜찮아."
"그래도.... 이거 빗물도 다 들이차서 너무 쓰레기 같잖아."
"캔이라서 안에 내용물은 멀쩡해. 나 커피도 좋아하고."
"렌이 괜찮다면 뭐라 할 말은 없지만... 정말 그걸로 괜찮아?"
흥분한 고료를 말리는 나나호시가 빗물이 고인 비닐봉지에서 꺼낸 캔커피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커피 잘 마실게' 따위의 말을 하고 또다시 생긋 웃었다. 아쉬움의 표현이라든가 서운하다는 표현은 일절 없었다. 오히려 정말로 고맙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이 유치하고 쓸데없는 파티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다. 방금 나나호시의 표정을 보고 신곡의 마지막 부분이 어떻게 수정될지 감이 잡혔다. 자리에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걸어가자 고료를 포함한 다른 녀석들이 바로 돌아가버리는거냐며 아쉬운 표현을 했지만(왜 저들이 아쉬움을 드러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아랑곳하지 않고 문을 닫고 집 밖을 나왔다. 다행히 밖에 하늘은 개어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 축축한 공기는 곧장 다시 상쾌한 공기로 바뀌었고 폐 안에 깨끗한 산소를 집어넣었다. 방금 따스했던 공간에서 나와서 그런가 바깥은 약간 쌀쌀했다.
고료의 마지막 말이 뇌에서 떠나질 않았다.
'제대로 준비해서 전해주지 않으면 마음이 전달되지 않아.'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신곡도 조금 있으면 금세 완성될 것이고 준비한 생일선물도....
"마음을 담아서.... 인가."
마음을 담지 않으면 전해지지 않는 선물. 아까 건넨 캔커피를 받고 나나호시는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지. 정말로 기뻐하는 표정 뒤에 숨은 진짜 감정은 무엇이었지. 눈동자 안에는 내가 들어있었지만 그 눈동자를 벗어난 뇌리에는, 시선 끝에는, 심장의 한구석에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서있었을까. 그걸 확인하기 위한 선물이니까 꼭 받아야 한다. 감정 따위 내 알바 아니지만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라면 언젠가는 이 선물을 줘야만 한다. 다른 마음이라면 이 선물은 종이쪼가리가 되겠지.
"마음을..... 하, 웃기지도 않는군."
마음을 담아 선물하는 건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다. 특히나, 나나호시 같은 녀석에게는. 그래서 이번에도 제대로 된 선물을 전해주지 못하고 싸구려 캔커피로 때우는 것이다. 네 시선 끝에 서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일까 봐. 그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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